진흙속의연꽃

보리도차제론

담마다사 이병욱 2006. 8. 24. 09:33

보리도차제론

 

 

2001년 5월~2002년 9월 '동대신문'의 보리수 칼럼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여기에 실린 다섯 꼭지의 글은 그 순서 그대로 <보리도차제론>의 수행체계에 대응됩니다.보리도차제론의 내용을 알고 싶으면 초펠 저, <깨달음으로 가는 올바른 순서>(여시아문 출판사)를 읽어 보세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마음을 순서대로 익혀야 진정한 불교인이 됩니다. 앞의 마음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사람은 다음 단계의 수행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1. 종교심(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 마음):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생각함으로써 재물욕과 명예욕을 제거합니다

"꽃들은 다 어디로 갔나? "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봄인가 했더니 계절은 벌써 여름의 끝에 와 있다. 지난봄에 연분홍으로 산야를 물들였던 진달래꽃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을까? 계절은 냉혹하리만큼 무상의 법칙에 순응한다. 월남전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젊은이들을 위해 바쳐진 반전 팝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에서는 윤회하듯이 무상하게 이어지는 죽음의 슬픔을 다음과 같이 엮어 낸다; 만발했던 꽃들은 소녀들이 꺾어가고, 그 소녀들은 뭇 사내들의 아내가 되었으며, 전쟁터로 나간 그 사내들은 결국 목숨을 잃어 무덤 속에 묻히고 만다. 그리고 그 무덤 위에선 다시 예전처럼 꽃들이 피어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미처 그럴 줄 모르고 살아간다.


   무상한 세상만사 가운데 우리를 가장 슬프고 두렵게 만드는 것은 죽음의 무상함이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기조차 싫어한다. 젊은 나이에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 죽고 만다는 사실을 절감할 경우 우리는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죽음과 무상에 대한 생각은 우리에게 진정한 종교심이 싹 트게 해 준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열반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농작물 중에서 가을의 결실이 제일이듯이, 모든 발자국 중에서 코끼리의 발자국이 제일이듯이, 모든 생각들 중에는 무상에 대한 생각이 제일이니라'.


   마치 화두를 들 듯이 '그렇게 만발했던 꽃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라는 의문으로 시작하여 무상과 죽음과 순환, 그리고 그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흥얼거리는 지극히 불교적인 팝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은 Joan Baez의 청아한 목소리로 들을 때 가장 감동적이다. 이렇게 화창하게 젊은 날, '쉰 세대'의 젊었던 가슴을 질퍽하게 적셨을 그 올드 팝을 틀어 놓고 우리의 가슴 속 깊은 곳, 죽음의 연못으로 사색의 두레박을 내려보자.
(노래를 듣고 싶으면, '꽃들은 다...' 플래시 영상을 클릭해 보세요)


2. 출리심(해탈하고 싶은 마음): 내생에는 지금과 같이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지극히 힘들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인간계든 하늘나라든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강화합니다

" Unhappy birthday to you!"

   사람들은 생일이 되면 축하의 노래 부른다. 'Happy birthday to you'. 그러나 이는 타인의 눈에 비친 착각이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탄생이라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회의 세계에서 우리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경우 감옥과 같은 자궁 속에서 열 달간 갇혀 있어야 한다. 앞에는 오줌이 출렁이고, 뒤는 똥이 둘러싸고 있다. 탯줄을 통해 양분이 공급되는데 그 모두가 입에 넣어 씹었던 더러운 음식들이다. 탄생의 순간이 되면 기름틀에 넣고 쥐어짜는 듯한 아픔이 엄습한다. 좁은 출구를 통해 나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 겨우 밖으로 나왔더니 부드러운 헝겊으로 감싸주는데 마치 칼날이 스치듯이 아프다.


   하늘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이라는 윤회의 세계 중, 행복한 세계에 속하는 인간계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이 지독한 탄생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노병사의 고통이 이어진다. 하늘나라 역시 완전한 곳은 아니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하늘나라에는 '전생에 자신보다 공덕을 많이 지어 위력을 갖게 된 천신에 대한 공포'가 있다고 말한다. 마치 대기업에 취직한 신입사원이 회사 밖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회사 내에서는 상사의 위압 속에서 지내듯이. 또 하늘나라에는 '죽을 때의 공포'가 있다고 말한다. 천신은 죽을 때 자신의 내생을 짐작하고 지극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누리며 전생에 지었던 공덕을 모두 탕진해버린 천신은 죽은 후 대개 축생이나 아귀로 태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옥과 아귀와 축생의 세계는 물론이지만 인간계와 하늘나라조차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세계가 아니다. 이런 자각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고자 하는 해탈의 마음'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은 '위대한 성자인 아라한'이 되어야만 가능한 축복이다.


3. 도덕성(꿈에도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 인과응보의 법칙을 익혀 절대 남을 해치지 않고 나를 해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나를 해치는 것으로 음행을 들 수 있습니다. 고결하지 못한 행위인 음행은 육도 윤회의 세계에서 나를 하등한 중생으로 추락시키는 인이 됩니다

"착하게 살면 손해볼까?"

   우리는 삶이 고달플 때면 '착하게 살면 손해본다'고 푸념하며 도덕적 행동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만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 역시 '사기'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통탄한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평생을 도둑질로 살아간 포악한 도척은 호의호식하며 천수를 누리고 죽었으나, 인덕을 쌓고 행실이 고결한 백이와 숙제는 굶어 죽고 말았다. 도대체 하늘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백이와 숙제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윤회와 인과응보의 이치에 비추어 볼 경우 도척이 누린 행복은 그가 전생에 지었던 자신도 모르는 선업에 기인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도척은 그 현생에 저지른 악업으로 인해 그 후생에는 한없는 고통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도척은 호의호식하고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전생에 지었던 선업의 과보를 모두 탕진해 버렸고, 악업을 지으며 살아감으로써 내생에 받게 될 괴로움의 부채만 잔뜩 짊어진 채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저축에 비유하면, 예금한 돈도 모두 까먹고 갚아야 할 빚만 지며 일생을 살아간 꼴이다.


   그러나 착하게 살 경우 이는 미래, 또는 내생에 내가 누릴 행복을 예금하는 것이 되고, 손해를 보는 경우 이는 과거, 또는 전생에 내가 지었던 악업의 부채를 갚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착하게 살면 손해본다'는 자조적 조건문을 '손해를 보더라도 언제나 착하게 살자'는 양보명령문으로 수정하여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이와 아울러 자업자득하는 인과응보의 순환이 현생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착하게 살면 이롭다'는 격언이 누구에게나 회자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불교인의 도덕적 삶은 인과응보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함께 출발한다.


4. 자비심(다른 생명체를 자신의 몸과 같이 아끼는 마음): 모든 생명체는 전생에 한 번 이상 나의 어머니였기에 그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겠다는 생각을 되풀이해도 됩니다. 가장 미워했던 사람조차 가장 아끼고 싶어질 때까지 계속 생각합니다.

"나와 남을 바꿔보기"

   남산 아래 연못으로 봄나들이 갔다. 따스한 햇볕 아래 비단잉어들이 무리 지어 헤엄치며 산 그림자를 흩트리고 있었다. 동행한 누군가가 말했다. 다음 생에는 연못 속 비단잉어로 태어나 걱정 없이 살고 싶다고.
그런데 이렇게 평화로운 봄날의 감동을 깨뜨린 것은 건빵 한 조각이었다. 여행 온 학생 하나가 연못에 건빵을 던졌다. 꽃 그림자 드리운 투명한 연못이 순식간에 물거품을 일으키며 수라장으로 변했다. 아름답던 비단잉어들이 건빵을 향해 솟구쳐 올라와 입을 뻐끔거리며 서로를 밀쳐댔다. 쿵! 하고 발을 구르자 잉어들은 찔끔 놀라며 잠수했다.


    목가적 풍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뒷산에 종달새 울고, 송아지는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냇가에 송사리 떼지어 노는 모습은 모두 착각이었다. 배고픔과 피살의 공포로 떨며 살아가는 것이 가련한 짐승의 삶이었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우리가 다른 생명체를 대할 때, 그가 사람이든 짐승이든 벌레든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대하라고 가르친다. 이를 '나와 남을 바꿔보는 수행'(자타상환법)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수행을 되풀이 할 경우 우리의 가슴속에서 자비심이 자라나게 된다.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는 것은 부처님을 닮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타상환법'의 수행은 부처님의 출가하시기 전 마음을 닮게 해 주는 수행이다. 어릴 때부터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보고 슬퍼하시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과 달리, 이기심으로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경우 나와 남을 바꿔 보는 '자타상환법'을 닦아야 자비심이 자라난다. 이렇게 자타상환법을 통해 자비심이 강화될 때 아라한을 지향하던 수행자는 열반을 유예하게 된다. 무한히 윤회하는 보살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억 겁 동안 윤회하며 고통받을 다른 생명체들을 버려 두고 나 혼자 떠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5. 청정견(일체 아무 것도 없다는 공성에 대한 자각): 공성을 자각함으로써 삶도 없고 죽음도 원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그 동안 나를 괴롭혔던 철학적, 종교적 고민이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사라집니다.

"공, Animation, 해체"

   근세 한국불교의 새벽을 연 효봉스님은 용맹정진하시던 토굴의 벽을 부수고 나와 다음과 같이 당신의 깨침을 노래하셨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줄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확고부동한 듯이 보였던 세상 만사의 질서는 선승 효봉이 휘두른 반야의 칼질에 의해 재조합되고 만다. 효봉스님은 공에 대한 투철한 조망에 토대를 두고 파격의 오도송을 읊조렸던 것이다. 공은 지적인 해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공에 대한 조망이 확고해질 때 우리의 종교적 번민 역시 해체된다.


   우리는 Animation과 같은 영상물을 통해 선승들의 오도송과 같은 파격적 장면들과 만난다. '바위에 눌려 종이장처럼 납작해진 늑대가 다시 살아나 토끼를 쫓는다. 핸드폰에서 무지개 빛 물감이 분사된다. 모든 사람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글씨가 구름으로 변했다가, 꽃바람이 되어 몰아친다. … 돌사자가 웃는다. 석녀가 아이를 낳는다.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마신다.' 이 모든 것들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TV, 영화, Cyber Space 등을 통해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이와 유사한 파격들을 감상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해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불교를 모르는 사람도 도처에 널린 영상매체를 통해 고정관념의 해체를 훈련한다. 그러나 선승이 체험한 깨달음의 해체와 영상을 통해 제공되는 예술적 해체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선승의 경우 수행을 통해 관념만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집착 역시 해체한다. 불교전문용어로 말하면, 법공만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아공도 터득한다. 아공이 터득될 때, 즉 이기심과 자의식이 해체될 때 선승의 가슴에서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이 솟게 된다. 그러나 영상매체가 제공하는 해체는 지적이고 관념적인 영역만 건드릴 뿐, 우리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 분노는 잠재우지 못한다. 무중력의 공간, 영상의 시대에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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