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깨달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08. 5. 16. 17:53

 

깨달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일까

 

 

 

 

성내지 말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불교가 유일

 

길거리에서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한편은 나이가 많고 다른 한편은 새파랗게 젊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알고 보면 사소한 일인데 말다툼을 하다 보면 감정 싸움으로 번진다. 처음에는 존댓말로 하다가 나중에는 육두문자로 발전 한다. 나이가 많은 편에서는 어이가 없어 하는 표정이 역력 하다.

 

불교에서는 성내지 말라고 한다. 10악 참회중에 성내지 말 것을 말하고 중죄를 짖는 것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종교 중에 성내지 말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불교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 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수행을 했다고 하는 수행자에게서도 성내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해석 해야 할까.

 

최근에 깨달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깨달음이란 특별한 것도 아니고 몇몇 사람들에게 허용 된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깨달음은 수행을 통하여 도달 하는 궁극적인 경지로서 탐욕과 분노와 우치가 영원히 소멸된 참다운 마음의 평화를 이룬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깨달았을 지라도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다면 깨닫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편제를 보면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득음을 하게 되면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라는 것이다. 비록 가난 하게 살지라도 최고의 경지에 올라 서면 부러울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깨달았다면 부귀영화가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미 우주의 원리를 다 알았고 우주와 한몸이라면 더 이상 가질 것도 없고 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단지 필요한 만큼만 가져다 쓰는 정도 일 것이다.

 

십악참회만 제대로 해도

 

불교의 최고의 목표는 니르바나이다. 니르바나에 도달 하려면 탐진치를 내려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탐진치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불자들은 깨달음을 저 멀리 있는 것이라 생각 하고 가려고 할 엄두도 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나하고는 무관하고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성취 할 수 있는 목표라 생각 한다. 그리고 여전히 탐진치에 빠져서 살아 간다.

 

천수경에 십악참회가 있다. 거기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중죄로 보고 있다. 그리고 참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깨달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지 모른다. 천수경에 나와 있는 내용 대로 십악참회만 제대로 해도 깨달음의 길에 한 발 더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강제 하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더 어려울 지 모른다.

 

탐진치만 소멸 시켜도 깨달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다. 탐진치가 소멸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부처라 보아도 될 것 같다. 깨달은 사람들은 탐진치가 소멸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득음을 하게 되면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고 했는데 깨닫게 되면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고 항상 즐거운 상태 일 것 같다. 깨달음을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 하고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하기 전에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반드시 산중에 들어가서 수행을 해야만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나 바로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깨달음이 무언지 아는 사람이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 해본다.

 

 

 

 

200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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