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창조론 vs 연기법 (緣起法),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 미래의 선택은

담마다사 이병욱 2009. 2. 12. 09:18

 

창조론 vs 연기법(緣起法),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 미래의 선택은

 

 

생물학적 진화만 있을까

 

다윈은 진화론을 주장 하였다. 생물집단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를 축적 하여 집단전체의 특성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종의 탄생을 야기 한다는 이론이다. 주로 유전학적인 관점에서 본 진화론은 생존확률이 높은 유전자가 자손을 남기고 생존확률이 적은 유전자는 도태 됨 으로서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의 또 한 축은 '돌연변이'이다. 생물체에서 어버이의 계통에 없던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 유전하는 현상이 돌연변이다. 돌연변이설만으로 본다면 생물의 진화는 연속적이 아니라고 주장 한다. 어느 경우이든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는 존재만이 살아 남는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본 진화론이 일상에서 다반사로 쓰여 지고 있다. 보다 발전 된 양상을 보통 진화 했다고 한다. 진화 하는 컴퓨터, 진화되고 있는 축제 등 심지어는 범죄 수법도 진화 한다고들 한다. 실수와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더 개량하고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 현대판 진화론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퇴보 하는 경우도 있다. 점점 더 못하게 되고 그러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진화와 퇴보의 사이에 정체가 있다. 움직임 없이 고요하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는 진화에 가까울까 퇴보에 가까울까. 보통 퇴보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때 드는 비유가 자전거이론이다. 자전거는 멈추면 넘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나아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자전거이다.

 

앞으로 나아 갈 때만이 진화 된다. 움직이지 않으면 정체 되고 퇴보 되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종교는 어떠 할까.

 

거짓말을 해도 큰 거짓말을 해야

 

진화론과 대비 되는 것이 퇴보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과 전혀 다른 개념인 '창조론'이 있다. 주로 종교에서 쓰는 용어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본 다면 창조론은 허구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기 때문이다. 인과관계가 없는 창조론은 그냥 믿음일 뿐이다.

 

창조론을 주장 하는 종교가 있다. 지구상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유일신교가 대부분 창조론을 주장 한다. 여기에는 결과만 있지 원인은 상세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 것 자체가 모순임에도 불구 하고 많은 사람들은 큰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다. 신의 뜻이라든가 신의 섭리라는 애매한 이야기로 두리뭉실 넘어 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와 자연현상에 대하여도 숙고함이 없이 신이 의도한 결과라고만 이야기한다. 이런 일방적이고도 무책임한 이론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 하고 거짓임을 밝힌 사람이 '붓다'이다. 신이 이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붓다는 창조론에 대하여 '대망어(大妄語)'라고 주장하였다. 커다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에 대하여는 따지고 민감하게 반응 한다. 그러나 거짓말 자체가 창조론과 같은 큰 거짓말에 대하여는 대체로 침묵한다.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해도 창조론과 같은 큰 거짓말을 해야 침묵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뭘 몰라서 하는 행위

 

불교에서는 이세상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런 사항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처한 현실을 직시 하라고 말한다. 지금 상황과 무관한 이야기는 모두 '관념'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알아 차리고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하여 알아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인식할 수 없는 세계에 매달리는 것은 현재를 살아 가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관념의 소산인 창조론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관념으로 신을 만들어 놓고 비는 행위는 무지의 소산이다. 오로지 원인과 결과에 의하여 조건 지워진 삶을 살아 가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오직 존재의 행위만 있을 뿐이다. 그 행위가 원인이 되어 다음 행위에 또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싸이클이 무수하게 반복 되어 세상은 굴러 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이론이 12연기 법칙이다. 이런 행위를 함으로서 씨가 되고 그 다음 행위가 일어 나는 토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 이론은 누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자연계에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다만 붓다가 그런 현상을 최초로 발견 했을 뿐이다.

 

12연기의 출발점은 '무명(無明)'이다. 다른 말로 '무지'라고도 한다. 모르기 때문에 미혹이 생긴 다는 것이다. 알고 나면 잘못된 믿음에 넘어 갈 이유가 없다. 신이 이세상을 만들었느니 하는 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무명이 대죄라고 하지 않던가.

 

 

 

 

 

 

관념이 만들어 낸 허상 속에

 

12연기를 제대로 이해 하면 윤회는 확실히 있다고 확신 하게 된다. 아마 창조론 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해 하기 쉬운 것이 12연기 법칙일 것이다. 이런 12연기법은 불교에 있어서 시작이자 끝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우주의 근본법칙이 왜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될 듯 하다.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지성(智性)'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동참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지성들은 이미 오래 전 부터 불교에 주목해 왔고 급속하게 확산 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집에 불상 하나 없으면 지성으로 간주 되지 않을 정도라는 말이 오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현상과 반대로 우리나라는 아직도 미망에 휩싸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념이 만들어 낸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고 관념에서만 살아 가는 모습이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불교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대승불교에서 타력적인 요소가 관념의 소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도 하는 행위 자체는 전부 관념의 소산일 수 있다. 대상을 설정 해 놓고 기도 하는 행위는 유일신교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을 직시 하지 않고 하나의 이미지에만 의존 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마음속의 이미지와 자신을 일치 시켜 가는 행위가 기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기자신에게 빌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 속에 내재된 과거의 행위를 부지불식간에 끄집어 내고 또는 관념으로 만들어 내어 자기만족을 추구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타파 하기 위하여 붓다가 12연기를 발견 하였고 세계의 지성들은 지금에 와서야 깨우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관념을 보기 보다는 실재를 보는 현상으로 사조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종교도 진화 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200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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