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권 담마와나선원 II
사람은 죽어서 유골을 남긴다. 설령 그것이 분쇄된 가루일지라도 흔적을 남긴다. 윤회하는 과정에서 쌓이고 쌓이면 얼마나 될까?
쌍윳따니까야에 ‘사람의 경(Puggalasutta)’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일 겁의 세월동안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그가 남긴 유골을 한 데 모아놓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그 유골의 더미는 베뿔라 산만큼이나 클 것이다.”(S15.10)라고 했다.
베뿔라산은 라자가하 오악 가운데 하나이다. 2018년 인도순례 갔었을 때 베뿔라 산을 찾아 보았다. 경전에서 본 것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어디가 어디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만 부처님이 경전에서 베뿔라산을 말했기 때문에 역사적 현장에 와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일겁을 윤회하면 유골의 양은 베뿔라산만큼이나 될 것이라 한다. 일겁이면 우주의 성주괴공의 시기를 말한다. 어느 정도 시간인가? 경에 따르면 “수행승이여, 예를 들어 큰 바위산이 하나 있는데 길이가 일 요자나이고 넓이가 일 요자나이고 높이가 일 요자나이며 간격이 없고 균열이 없고 견고한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백년에 한 번씩 까 씨 국의 옷으로 스치고 지나간다면, 수행승이여, 그 큰 바위산이 그러한 방법으로 소모되어 없어져 버리는 기간이 있다. 한 겁은 그것보다 더욱 긴 시간이다.”(S15.5)라고 했다.
쌍윳따니까야 ‘산의 경(Pabbatasutta)’(S15.5)에 따르면 일겁은 한량없다. 윤회하면서 사람으로 태어나 남긴 유골의 양은 베뿔라산만큼이나 된다고 했다. 어쩌면 베뿔라산보다 더 많을 것이다. 히말라야산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높이가 300여미터 밖에 되지 않는 베뿔라 산만큼이라 했을까?
글을 쓰면서 이런 통찰이 일어났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일겁을 윤회할 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경전에서 확인해야 한다.
수많은 경전을 읽었다. 빠알리경전을 말한다. 그 가운데 쌍윳따니까야 ‘다른 곳의 경(Aññatrasutta)’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뭇삶(衆生)은 매우 적고 인간과 다르게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S56.61)라고 했다. 이를 큰 대지와 손톱 끝에 있는 흙먼지로 비유해서 설명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를 ‘맹구우목의 비유’로 설명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쌍윳따니까야 ‘구멍의 경(Macchiggaḷasutta)’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하나의 구멍이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고 나는 말한다.”(S56.47)라고 말했다.
한번 축생의 지위로 떨어지면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이를 눈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번씩 떠 오르는 널판지의 구멍에 머리를 끼워 넣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한번 축생이나 아귀, 지옥과 같은 악처에 떨어지면 사람 몸 받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다. 더구나 정법을 만나서 다행이다. 부처님은 정법 만난 것에 대하여 역시 ‘맹구우목의 비유’를 들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매우 희유한 일이다. 일겁을 윤회하는 동안 유골의 양을 모아 놓으면 고작 300여미터의 베뿔라 산만큼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은 타당하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많아야 백년을 살다가 죽는다. 한번 태어나면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그런데 수명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한한 생명이다. 인간을 비롯하여 축생은 수명은 보장되지 않는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이 최후의 날이 될 수도 있다.
보험회사에서는 기대수명을 말한다. 기대수명은 해마다 늘어난다. 기대수명이 팔십세라면 팔십세까지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희희낙낙하며 감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그러는 동안 사람은 늙어가고 병이 들어 간다.
세월은 인정사정 없다.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정없이 흘러 간다. 흘러 가는 세월을 멈출 수 없다.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생명이다.
나는 잘 살아 왔는가? 이런 의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답할 수 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든 것에 대해서는 힘껏 능력껏 살아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 책을 만들었다. 책의 제목은 ‘149 담마와나선원 II’이다. 149번째 책으로 담마와나선원 다니면서 쓴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모두 13개의 글이 있다. 2023년 10월부터 2024년 11월까지 글 모음으로 201페이지이다.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북콘서트 부작용 극복을 위하여
2. 담마와나 북콘서트 준비 완료
3. 서로가 서로를 끌어 주는 수행의 향기, 담마와나선원 북콘서트
4. 한국고승들의 태국비구계 수계
5. 담마와나선원 2024년 3월 초청탁발법회
6. 오늘 하루는 출가수행자처럼, 담마와나선원 2024년 붓다의 날
7. 한국테라와다불교 2024년 우안거 입재법회
8. 일주일에 한번은 비워주는 것도, 일요포살날 오후금식하기
9. 저녁 한끼 안 먹었다고 해서
10. 한국테라와다불교 2024년 우안거 해제의 날에
11. 빤냐와로바라기가 되어
12. 담마(法)가 나를 부른다, 2024 담마와나선원 까티나
13. 비린내 나는 세상
글은 주로 법회에 참석한 것 위주로 썼다. 붓다의 날이나 까티나 가사공양법요식 같은 것이다. 특히 빤냐와로 스님이 참석한 법회에 빠지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목차 11번에서 ‘빤냐와로바라기가 되어’(2024-10-15)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어느 불자는 말한다. 절에 가는 것은 스님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보러 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담마와나선원 가는 것은 부처님 보러 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보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
스님도 스님 나름이다. 테라와다불교스님이라 하여 정법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테라와다 스님의 말을 들어 보면 정법과 동떨어져 있다. 명색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간주하는 것에서 실망했다. 또한 모든 것을 인식하는 마음으로 보아 일체유심조를 말하는 것에서도 실망했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마음이 차분하다. 유튜브로 십년전의 법문을 들어 보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진리를 설하는 자의 법문은 들을만하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는 법문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생에서 무엇을 남겨야 할까? 글 밖에 없다. 지난 19년동안 쓴 글은 산이 되었다. 마치 일겁을 윤회한 중생이 남긴 유골의 양과 같은 것이다.
매일 아침 글을 쓴다. 이른 아침부터 쓰기 시작하면 오전은 훌쩍 지나가버린다. 이런 세월을 2006년 이후 19년동안 살아 왔다. 매일 쓰다 보니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구슬은 꿰어야 보배이다. 글은 책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제까지 쓴 글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 148권 만들었다. 이번에 만들면 149권이 된다. 자영업자로 살면서 이룬 성과이다.
지난 시절을 돌아 본다. 인생구분을 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직장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직장생활 20년 했고 자영업으로 20년 살았다. 전자는 머슴으로 산 것이고 후자는 주인으로 산 것이다.
직장은 자주 옮겨 다녔다. 타의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회사가 사업을 접으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 20년에 무려 열 번 이상 옮겼다.
직장생활 할 때는 글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직장과 집을 왕래할 뿐이었다. 글을 쓰게 된 것은 나의 일을 하고 나서부터이다. 일인사업자로 살다 보니 시간부자가 되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직장생활과 자영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번 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글은 남아 있다. 블로그에 올려 놓은 글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것도 재산이 될 것이다.
재산이라 하여 반드시 돈이나 토지, 건물과 같은 유형의 재산만을 뜻하지 않는다. 글도 재산이다. 비록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형의 재산이다. 책으로 만들어 놓고 책장에 전시에 놓으니 마음이 뿌듯하다.
글은 내것이 아니다. 인터넷에 올려 놓는 순간 모두의 것이 된다. 책도 내것이 아니다. 피디에프(pdf)파일을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려 놓으면 모두의 것이 된다. 누구나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글이나 책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이는 회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애써 작성한 글을 누군가 가져 간다면 그 사람의 공덕이 될 것이다. 마치 불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다.
마을에 어떤 사람이 불을 지폈다. 불은 부싯돌과 부싯목을 이용하여 두 손바닥으로 비벼서 만든 것이다. 한번 불을 지피면 모두의 것이 된다.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공덕회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애써 작성한 글을 “누가 볼까?”라며 의문하는 것이다. 책으로 만든 것을 “누가 다운받을 것인가?”라고도 의문해 본다.
초창기 글을 쓸 때 종종 받는 질문이 있었다. “혹시 스님 아닙니까?”라든가 “혹시 학자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스님이 글을 쓰고 책을 내면 관심 가질 것이다. 교수가 글을 쓰고 책을 내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자영업자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에 대하여 누가 관심을 가질까?
요즘 인터넷시대이다. 모든 정보는 오픈되고 공유된다. 담마와나선원 갔을 때 어떤 젊은 사람이 아는 체 했다. 밴드에 올린 글을 보고 왔다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에 대한 글을 보고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물건을 만들면 팔리게 되어 있다. 글을 올리면 누군가 보게 되어 있다. 블로그에 올린 글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누군가 검색하면 십년전에 올린 글도 볼 수 있다.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가능한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유골을 남긴다. 일겁을 윤회하면 베뿔라산만큼이나 유골의 탑이 될 것이라 한다. 이는 많은 양이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매우 희유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글을 남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수천개의 글을 남겼다. 2006년 이후 쓴 글은 얼마나 될까? 티스토리에 7,646개의 글이 있다. 네이버블로그에는 303개의 글이 있다. 모두 합하여 7,949개의 글이다.
2024년 11월 9일부터 네이버에 글을 올리고 있다. 이전에는 티스토리에 올렸다. 더 이전에는 ‘다음블로그’에 올렸다. 다음블로그가 폐쇄 되면서 티스토리로 이전했는데 키를 잃어 버려서 네이버에 쓰게 되었다.
이제까지 7,949개의 글을 썼다. 그리고 이번에 149권의 책을 만들었다. 피디에프파일을 인쇄하고 제본하여 책을 만들어 놓으니 책장으로 가득하다. 마치 일겁을 윤회한 자가 산만큼이나 유골을 남긴 것과 같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 일겁을 윤회하는 동안 베뿔라 산만큼이나 유골탑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글쓰기는 쉽지 않다. 책장 가득 책을 남기는 것도 쉽지 않다.
글이나 책은 돈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자기만족인지 모른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썼기 때문에 진리의 말에 가깝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한다. 십년전에 써 놓은 글을 읽었을 때 새롭다.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것과는 다르다.
오늘도 한편의 글을 썼다. 오늘은 한권의 책 서문을 썼다. 이렇게 해서 149번째 책이 탄생되었다. 이를 모두 회향한다. 블로그에 피디에프를 올려 놓는 것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누군가 글을 읽고 공감했다면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다.
2025-04-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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