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권당

162권 위빠사나수행기 2025

담마다사 이병욱 2026. 1. 13. 19:25

 

162권 위빠사나수행기 2025

 

 

눈을 감고 살 수 없을까? 눈을 감으니 편안하다. 갈애를 일으키는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한다. 귀를 막고 살순 없을까? 불쾌를 야기하는 것들로부터 해방이다.

 

“그대의 눈이 밝을지라도 장님처럼 행동하라. 그대의 귀가 밝을지라도 귀머거리처럼 행동하라.”라는 담마마마까 법요집의 구절이 있다. 선원에서 지켜야 할 수행수칙에 대한 것이다.

 

선원수칙을 보면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라고 했다. 이어서 “그대의 말이 웅변일지라도 벙어리처럼 행동하라. 그대의 몸이 건강할지라도 환자와 같이 행동하라.”라고 했다. 이번에는 벙어리와 환자가 등장했다.

 

수행은 잠 잘 때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가? 이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뒤척이지 말고 송장처럼 가만히 관찰하면서 잠들어라.”라는 수행수칙을 말한다.

 

수행을 하려면 바보, 멍텅구리가 되어야 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들리면서도 못들은 척하는 것이다. 달변이면서도 침묵한다. 건강하면서도 허리 아픈 환자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잘 때는 송장처럼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새김(sati)과 관련이 있다.

 

새김이 있는 삶과 새김이 없는 삶이 있다. 전자는 수행자의 삶이고 후자는 범부의 삶이다.

 

수행자는 대상을 늘 새겨야 한다. 어떻게 새기는가?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걸을 때는 걷는다고 분명히 안다.”라며 새기는 것이다. 걸을 때 의도는 정신에 대한 것이고, 움직임은 물질에 대한 것이고, 움직임을 아는 마음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새기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형상은 물질이고, 형상이라고 아는 마음을 정신이라고 새겼을 때 형상에 대한 갈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어떤 소리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단지 “이것은 소리이다.” 라며 소리를 물질로 보는 것이다. 소리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는 “이것은 정신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소리에 대하여 명색구분새김하면 소리에 끄달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도 단지 소리일 뿐이다. 소리는 물질이고 소리라고 아는 마음은 정신이라고 구분해서 새기면 어떤 소리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꽃에는 향기가 있다. 라일락꽃 향기가 있어서 코를 댄다면 수행자가 아니다. 왜 그런가? 이는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 도둑이네.”(S9.14)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주지 않는 것을 취하면 도둑이다. 꽃향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승이 연꽃향기가 좋아서 매일 취한다면 향기도둑이 될 것이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듣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훔쳐본다는 말이 있다. 거리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때 자꾸 쳐다보는 것도 일종의 도둑질에 해당된다. 더구나 몰래 훔쳐본다면 향기도둑과 같은 것이다. 듣는 것은 어떠할까? 남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면 역시 도둑질이 된다. 이를 소리도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지켜보는 자가 있다. 출가수행자의 경우 천신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수행승이 연꽃향기가 좋아서 연꽃향기를 취할 때 향기도둑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출가수행승에게 목적지가 있다. 도와 과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이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감각적 욕망에 갈애를 일으킨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해탈과 열반의 길에 방해가 될 것이다.

 

누구나 꽃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출가수행승이 꽃에 코를 대면 허물이 된다. 그래서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라고 했다.

 

출가수행승은 수많은 제약이 따른다. 범부는 술을 마실 수 있어도 수행승이 마시면 큰 허물이 된다. 심지어 꽃향기 맡는 것조차 향기도둑이라 하여 도둑질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머리 깍고 가사 입은 수행승의 허물은 티끌만한 것도 농구공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다.

 

천신은 수행승은 보호해준다. 꽃에 코를 대었을 때 향기도둑이라 하여 일깨워 주는 것이다. 하루도 아니고 매일 코를 댄다면 갈애가 된다. 갈애는 탐욕이 되어 해탈에 장애요인이 되기 때문에 알려 주는 것이다.

 

수행승은 향기도둑이라 말하는 천신에게 의지하고자 한다. 자신이 잘못을 범했을 때마다 경고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천신은 거절한다.

 

천신은 수행승의 하인이 아니다. 고용자도 아니다. 시중드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천신은 “행복의 세계로 가는 길을, 수행승이여, 그대가 스스로 알아야 하네.”(S9.14)라고 말했다.

 

수행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남이 대신해주는 것은 아니다. 해탈과 열반도 스스로 얻는 것이다. 남이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신은 수행승이 방일에 빠졌을 때 충고해 준다.

 

향기도둑에 대한 경을 보면 수호천사가 있는 것 같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천신이 있는 것이다. 범부보다는 출가수행자에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게으름 필 때, 감각에 대한 갈애를 일으킬 때 말해 주는 것이다.

 

천신과 같은 수호천사가 있을까? 초기경전에서는 수많은 천신이 등장한다. 천신과 대화하는 장면도 많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만 나타날 것이다.

 

수행승이 방일하면 천신이 우려할 것이다. 마치 축구경기 할 때와 같다. 선수가 골문 앞에서 똥볼 찼을 때 해설자가 아쉬워하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수행을 잘하면 어떻게 될까? 마치 아나운서가 흥분해서 중계하는 것과 같다.

 

나에게도 수호천사가 있을까? 한번도 본 일이 없어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위안은 있다. 어떤 것인가? 이는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 가르침이 잘 닦여지면, 공덕이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Thag.303)라는 가르침이다.

 

법은 법을 지키는 자를 보호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 대로 살면 가르침이 보호한다. 천신이 보호해 주는 것과 똑같다.

 

재가우안거 77일째이다. 오늘 아침에는 삼십분 행선하는 것으로 수행을 했다. 다행히도 삼매는 형성되었다. 눈 감은 것이 크다.

 

행선할 때 눈 감고 한다. 좌선할 때도 눈 감고 한다. 눈을 감는 것은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귀까지 막고 행선이나 좌선할 수 없다.

 

눈 감은 효과는 크다. 움직임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형상은 집중에 방해가 된다. 눈을 감았을 때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는데 발의 움직임이나 배의 움직임을 보게 된다.

 

오늘 아침에는 먹을 때도 눈을 감고 먹어 보았다. 찐 것으로 계란, 고구마, 감자, 단호박을 먹고 난 다음 생으로 된 당근을 먹었다. 당근 먹을 때 눈을 감고 먹었더니 오로지 움직임만 있는 것 같았다.

 

움직임은 풍대에 대한 것이다. 발의 움직임도 풍대에 대한 것이고, 복부의 움직임도 풍대에 대한 것이다. 이런 풍대를 어떻게 느껴야 할까?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을 보면 수행이 아니다. 발모양을 떠올리면 수행은 실패하게 된다. 발의 움직임만 보아야 한다. 복부도 움직임만 보아야 한다. 풍대를 보는 것이다.

 

풍대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움직임이 있을 때 이를 물질이라고 새기는 것이다. 움직임을 아는 앎은 정신이라고 새기면 된다. 이렇게 명색구분새김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커피를 마실 때도 눈을 감고 마셨다. 눈을 뜨고 마시면 커피라는 형상이 보여서 제대로 보지 못한다. 눈을 감고 마시면 맛만 알게 된다. 이때 맛은 물질이고, 맛을 아는 앎은 정신이 된다. 명색구분새김하는 것이다.

 

명색구분새김하면 일상에서 수행 아닌 것이 없다.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명색구분새김하면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색깔로만 보일지 모른다. 소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리를 명색구분새김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소리라는 물질과 소리라고 아는 앎인 정신만 있을 것이다.

 

수행은 삼매가 형성되어야 한다. 삼매가 형성되어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 선명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분명한 것을 말한다. 생멸을 아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삼매를 형성할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새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삼매가 형성되는 것 같다.

 

삼매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새김과 노력(精進)을 필요로 한다. 근접삼매에 근접하는 삼매를 말한다.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찰나삼매가 된다.

 

삼매가 형성되면 수행은 쉬워진다. 크게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 같다. 행선할 때는 내가 걷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이 세상에 오로지 의도와 움직임과 아는 마음만 있는 것 같다.

 

매일매일 행선과 좌선을 한다. 수행을 하고 나면 수행기를 작성한다. 모이다 보니 잔뜩 쌓이게 되었다. 이를 책으로 만든다.

 

수행기는 수행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삶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행선이나 좌선이 끝나고 난 다음 청정한 마음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쓴다.

 

올해 전반기 때 수행기를 모아 보았다. 이를 ‘162 위빠사나수행기 2025’라고 이름 붙였다. 162번째 책으로 2025년 1월 7일부터 7월 5일까지 기록이다. 모두 23개의 글에 249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행고성(行苦性)에 대한 이해

2. 삶이 힘겨울 때는 피안의 다락방으로

3. 정신물질로 환원하여 새기기

4. 행선(行禪)할 때 명색(名色)으로 환원하여 새기기

5. 끊임 없는 생멸로 핍박 받는 생체로보트

6. 아름다운 몸을 명상주제로 삼았을 때

7. 폭주하는 마음

8. 포기 했을 때 마음의 정화가

9. 나는 언제나 불음주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10.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의 밧줄로 꽁꽁

11. 오늘 새벽 마음이 충만된 것은

12. 멍에를 벗어 버리는 듯한 상태

13. 내가 명색인 것은

14. 새김(sati)이 있으면 날마다 좋은 날

15. 행선(行禪)에서 기쁨, 행복, 평온이

16. 오늘 하루도 생존투쟁하고자

17. 내가 사는 이유

18. 바보처럼 멍텅구리처럼 앉아 있을 수 없을까?

19.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20. 좋아하면 새김(sati)을 놓치기 쉬워

21. 마하시전통에서는 왜 복부관찰할까?

22. 현실직시의 가르침

23. 오직 명색(名色)뿐!

24. 이 몸을 도구로 하여

25. 삼매를 필요로 하는 생멸의 지혜

26. 좌선으로 사라진 편두통

27. 망상의 집을 지었을 때

28. 오늘 같은 날만 되어라

29. 행선(行禪)의 맛

30. 폴리우레탄 바닥의 덧신

31. 명상이 아니라 수행을 해야

32. 행선(行禪) 예찬

33. 행선(行禪)으로 번뇌제압하기

34. 던져진 존재와 태어날 곳을 선택하는 자

35. 나는 언제나 피가 철철 나도록

 

 

 

162 위빠사나수행기 2025_250910.pdf
3.33MB

 

 

 

수행기는 그날그날 기록한 것이다. 그날그날 느낀 것을 모아 놓으니 하나의 탑이 된 것 같다. 이를 문자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올해 본 전북진안 마이산에 갔었다. 그때 탑사에서 수많은 돌탑을 보았다.

 

마이산 돌탑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것도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이다. 대체 어떤 열정으로 만든 것일까?

 

돌탑을 만든 사람은 신선이 되었다. 탑사 대웅전에는 흰수염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다. 별도의 추모공간도 있다.

 

마이산 돌탑을 보고서 기쁨이 일어났다. 오랜 세월 수많은 돌탑을 만든 사람과 동일시한 것이다. 비록 탑의 재료는 다르지만 글로도 탑을 만들 수 있음을 말한다.

 

금자탑이라는 말이 있다. 후세에 오래 남을 뛰어난 업적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금자탑은 글의 탑을 말한다.

 

글을 모아 놓으면 책이 된다. 또한 글을 모아 놓으면 마치 돌탑과 같은 문자의 탑이 된다. 이를 ‘금자탑’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이번에 만든 책은 162번째 책이다. 돌탑을 쌓았다면 162개의 문자탑이 될 것이다. 마이산 탑사에서 본 크고 작은 무수한 돌탑과 같은 것이다.

 

글쓰기 하는데 과도한 시간을 보낸다. 아침에 삼십분 행선이나 좌선한다음에 두세 시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이 된다.

 

글쓰기도 수행으로 본다. 글을 쓰면 집중이 된다. 글을 쓰면 마음이 청정해진다. 무엇보다 글을 쓰면 향상하는 삶을 살게 된다.

 

2006년이후 쓴 글은 팔천개가 넘는다. 어느 것 하나 똑 같은 것은 없다. 모두 다 다른 글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매일매일 새로운 글을 쓰는 것이다.

 

향상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글을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써야 한다. 마음이 혼란된 상태에서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매일 아침에 글을 쓰는 이유가 된다. 또한 수행한 다음에 글을 쓰는 이유가 된다.

 

글은 매일 새로운 것이다. 매일 새로운 삶을 살기 때문에 어제와 다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글쓰기는 자신을 향상시키는 삶이 된다. 글을 수행의 방편으로 보는 이유이다.

 

책의 완성은 서문으로 나타난다. 마치 화룡점정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서문을 쓰면 하나의 책이 완성된다. 과연 누가 이런 책을 볼까?

 

점심 때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사람들은 맛집에서 먹는다. 그렇다고 맛집에서만 먹는 것은 아니다. 허름한 식당에도 손님이 있다.

 

어느 식당이든지 손님은 있다. 메뉴, 가격, 청결 불문하고 식당에는 사람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마다 취향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명하다고 하여 모두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모두 다 양서는 아니다. 세상에 팔리지 않는 책도 읽는 사람이 있다. 마치 점심시간 어느 식당이든지 사람이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지난번 161번째 책을 냈을 때 어떤 이가 문의했다. 책을 어떻게 구입하는지 물어본 것이다. 이에 블로그 백권당 카테고리에서 피디에프(pdf) 파일을 다운받으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누구라도 단 한사람 책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에 읽어 줄 사람 하나 정도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 사람은 “감사합니다. 잘 배우겠습니다.”라고 페이스북에 답글을 남겨 놓았다.

 

매일 글을 쓴다. 이런 글쓰기는 절망의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삶에서 절망한 것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삶은 절망이다. 왜 그런가? 이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돌탑을 쌓은 사람은 어떤 심정으로 쌓았을까? 어쩌면 눈물탑인지 모른다. 어떤 말할 수 없는 한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절망의 탑을 쌓은 것일까?

 

세상에 즐거워할 것이 없다. 세상은 고통스럽다. 이럴 때 도피한다. 글 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람은 죽어서 뼈를 남긴다. 일겁을 살면 그 뼈의 양은 얼마나 될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일 겁의 세월 동안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그가 남긴 유골을 한 데 모아놓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그 유골의 더미는 베뿔라 산만큼이나 클 것이다.”(S15.10)라고 했다.

 

베뿔라산은 라자가하 오악 가운데 하나이다.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다. 그런데 일겁을 윤회하면서 남긴 유골의 양이 고작 산 하나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적어도 히말라야급 산의 몇 개나 되어야 할 것이다.

 

일겁윤회의 유골이 얼마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려움을 말한다. 맹구우목의 비유로도 설명되고, 또한 대지와 손톱 끝의 흙먼지 비유로도 설명된다.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매우 희유한 일이다. 따라서 남긴 유골도 많지 않다. 일겁에 고작 뒷산 하나의 크기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남긴 행위의 양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매일 매순간 업을 짓고 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업을 짓는다. 이런 업을 쌓아 놓으면 얼마나 될까? 아마 수미산보다 더 높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무수한 업을 지었다. 그 가운데 구업도 있다. 구업 가운데에서도 필업이 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업을 지었을까? 이는 쓴 글로 나타난다. 쓴 글을 책으로 만드니 책장 하나 가득 되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자만일 것이다.

 

이제까지 162권의 책을 만들었다. 162개의 돌탑을 만든 것과 같다. 문자의 탑인 것이다.

 

공든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마이산 돌탑도 무너지지 않고 남았다. 문자의 탑도 무너지지 않을까?

 

오늘도 문자탑을 하나 만들었다. 올해 상반기 위빠사나수행기에 대한 것이다. 매일 삶에서 절망하며 쓴 기록이다. 이런 책을 누가 읽어 줄까?

 

 

2025-09-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