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스님의 가족여행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0. 12. 07:46

스님의 가족여행

 

 

사람들은 장점은 드러내고 단점은 숨긴다. 유리한 것은 알리고 불리한 것은 은폐하려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그러다보니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에스엔에스에는 자신에 대한 자랑으로 가득하다.

 

에스엔엔스에 글이나 사진, 동영상을 올리는 것은 관심을 받기 위한 것이라 본다. 이를 관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심종자, 끊임없이 관심을 받고자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리한 내용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자랑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때 이익 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올린 스님이 있다.

 

허정스님은 페이스북에서 어머니와 67일 여행한 가족이야기를 올렸다. 블로그에 쓴 어머니와 여행’ (http://m.blog.daum.net/whoami555/13742463 )이라는 제목의 글을 링크해 놓은 것이다. 출가한지 34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스님들은 출가하면 세상과도 인연을 끊을 뿐만 아니라 부모형제와도 인연 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연을 다시 맺으려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원만스님 죽음과 관련이 있다. 비교적 69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한 스님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더 늙기 전에,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하고자 한 것이다. 어쩌면 해원상생인지 모른다. 그동안 못다한 효도를 다하기 위함인지 모른다.

 

블로그 실린 스님의 여러 날의 글을 단숨에 읽어 내려 갔다. 읽을수록 애잔한 마음이 되었다. 또한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비추어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용기없음에, 비겁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다. 더이상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분 다 돌아 가셨을 때 친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고아 되었네.”라고. 나이가 적든 많든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고아가 된다. 부모가 있는 사람을 부럽게 느껴졌을 때 고아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본능적이다. 특히 어머니가 그렇다.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다큐를 보면 동물이나 인간이나 자식에 대한 애착은 마치 프로그램 된 것처럼 내리사랑이다. 짝짓기를 하여 새끼를 키우는 과정을 보면 인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인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다 컸을 때이다.

 

축생은 새끼가 독립해서 나가면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축생이 인간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해 본다. 독립적이지 않은 자식이 많다. 언제까지나 부모의 보호 아래 산다면 축생보다 못한 것이다.

 

자연다큐를 보면 측은한 느낌이다. 생존해 가는 과정이 너무 험난하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는 약한 것은 상위포식자에 의해서 언제든지 먹잇감이 된다. 마치 잡아 먹히려고 태어난 것 같다. 설령 상위포식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늘 굶주려 있다. 그럼에도 축생들은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를 하여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낸다. 오래 전부터 해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축생은 그저 생존하고 번식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다. 인간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또 하나 다른 것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It.36, A2.8)라고 말했다.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을 아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가장 크게 차별화 될 수 있는 덕목이다. 만약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면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에 대하여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라고 말한다.

 

세상에 태어나보니 인간이다.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안도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와 어떤 인연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법구경, 숫따니빠따, 테라가타, 테리가타를 보면 탄생과 관련된 인연담이 있다. 테리가타 십 육련시집에서 뿐니까 장로니의 출생인연담을 보면 그녀는 교만을 키웠기 때문에 오염을 끊을 수가 없었다. 교만을 토대로 하는 업을 지었기 때문에,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무렵, 부호 아나타삐디까의 하녀의 태에서 태어나, ‘뿐니까라는 이름을 얻었다.”(437)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 전생에 지은 업이 상호작용하여 선연이 되기도 하고 악연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나를 낳아 준 부모라는 사실이다. 이런 태어남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마하나마여, 몸은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구성되어 부모에게서 태어나 음식으로 부양되고,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찢겨지고,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S55.21)

 

 

이 몸은 부모로부터 형성되었다. 부모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깊은 인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수백생, 수천생 깊은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를 모태로 태어 났다는 것이다. 나를 아홉달 품어준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또 키워준 은혜를 뿌리칠 수 없다.

 

부모를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라며 부모를 탓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부모자식간의 인연은 천륜이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부모는 부모인 것이다. 설령 못배워서 무식한 부모일지라도 나를 있게 해 준 분들이기 때문에 무시해서는 안된다. 출가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허정스님의 어머니와 여행을 읽고 자신에게 비추어 보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액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보니 비겁한 자로 보였다. 매사에 그랬다. 어느 것 하나 적극적이지 않았다. 늘 수동적이어서 움직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남은 것은 후회와 회한뿐이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사자후를 토한다.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을 말한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어느 곳에도 걸림이 없다. 늘 진리와 함께 하는 자는 용기가 있다. 비굴하거나 비겁하지 않다. 지혜롭고 자비롭기 때문에 해원상생한다.

 

이 생에서 맺힌 것은 이생에서 풀어야 한다. 깨름찍한 것은 털고 가야 한다. 진실로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허정스님의 어머니와 67일 가족여행기를 보고나서 스님의 용기를 보았다. 이런 모습은 지혜와 자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매사에 용기 있는 삶을 필요로 한다.

 

 

2020-10-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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