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분노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2. 07:24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분노


선거가 끝난지 여러날이 되었다. 어떤이들은 여전히 아쉬워한다. 이미 끝난 것임에도 되씹고 곱씹는 것 같다. 선거의 패배가 분노로 나타나는 것 같다. 또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외적 분노가 분노가 이제 내부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물며 남을 어떻게 내뜻대로 할 수 있을까? 자식도 내뜻대로 되지 않고 배우자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통령도 내뜻대로 하고자 하는 것 같다.

에스엔에스에서 사람들은 분노를 표출한다. 분노를 표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는 말이 있다.

오늘 페이스북에서 원담스님 글을 읽었다. 선거패배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글이라고 본다. '마음은 돈키호테'라는 글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마음은 돈키호테>

돈키호테가 로시난테에 올라타 창을 꼬나 들고 풍차를 향해 달려든다. 자기 마음이 만든 적과 싸움을 벌인다. 마음속에 나타난 악마와 아무리 싸워본들 거기에 사용되는 에너지는 광기로 소진될 뿐이다.

성공하지 못할 가상의 투쟁은 신경계의 버튼을 점점 더 세게 누를 뿐이다. 좌뇌가 현실을 해석하는 마음이 화(분노, 적개심, 악의, 원한)가 났을 때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흥분을 더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거칠어지고 거세진 화난 마음을 만들어낸다.

마음이 만들어낸 적에게 마음이 만들어낸 화를 던지니 자기 마음속에서 두 가지 마음이 벌이는 싸움이다.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도깨비와 밤새도록 싸우다가 밝은 아침에 다시 보니 빗자루와 씨름을 하고 있더라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마음이 만들어낸 적과 싸운다는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때리는 것과 같아서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된다. 자기가 만들어낸 가상의 적과 싸우는 돈키호테가 우리의 모습이지 않은가?

마음대로 안 되는 내 자식과 내 아내와 남편 혹은 내가 그들의 기분을 맞춰야 하는 직장 상사나 동료들이 나에게 버겁거나 보기 싫게 느껴질 때 나는 그들을나쁜 놈, 싸가지 없는 놈, 고집쟁이, 거짓말쟁이꼰대, 개새끼로 단정하고 싸움하는 감정 상태에 들어간다. 현실이란 빈 간판에 마음으로 빨간 페인트를 칠하여나쁜 놈이라 쓰고 화내며 발로 찬다.

현실이란 빈 공간에 빨갛게 칠한 것도 내 마음이요, 빨간 놈이라면서 발로 차는 것도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작품을 내가 발로 찼으니, 내 발만 아프다. 대상에게 던진 미움과 화는 되돌아 나를 친다. 화난 사람은 화난 세계를 만든다.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에 제가 갇혀서 스스로 고통을 받는다.

오늘도 돈키호테는 집안에서나 집 밖에서, 국회와 거리에서, 매스컴에서 날조해낸 적을 향해 미움과 증오, 분노의 창을 찌른다. 그래서 나와 남이 괴롭고 세상이 시끄럽다." (원담스님)


편의상 원문에서 문단을 나누었다. 2018 1월 원담스님과 진주선원 불자들과 함께 인도성지 순례를 함께 한 바 있다.

원담스님은 세상을 내뜻대로 하고자 하는 사람을 돈키호테와 같다고 했다. 마음 속에 적을 만들어 놓고 싸우는 것이다. 결국 자신과 싸우는 것이 된다.


분노를 끊어서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끊어서 슬프지 않다.
참으로 하늘사람들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면 고귀한 님들은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끊으면 슬픔을 여의기 때문이다.”
(S1.71)


분노를 탐욕과 어리석음과 함께 삼독이라고 한다. 분노는 독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분노는 꿀과 같다고도 했다. 그래서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는 꿀이 있는 분노라고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분노하면 쾌감을 느낀다. 분노를 발산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분노는 분노를 부른다는 것이다. 마치 사탕을 먹는 것 같다.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더욱더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매맞은 자를 또 때리는 것이다. 마치 때리면서 즐기는 성도착증과 같다. 이는 다름아닌 분노의 가학성이다.

분노하면 할수록 쾌감을 느낀다. 동시에 분노하면 할수록 독이 생겨난다. 분노는 뿌리에는 독이 있고 꼭지에는 꿀이 있는 것과 같다.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고 종편에서도 볼 수 있다. 에스엔에스에서도 볼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이 분노를 생겨나게 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혐오스런 인상과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이다.” (A2.123)


혐오스러운 대상에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분노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은 어떤 것일까? 이는 대상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날 때 무상, , 무아로 아는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은 현상을 상, , 아로 보는 것이다. 분노는 조건 발생하여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임에도 항상 있는 것이라고 보고, 분노하며 쾌감을 느끼고, 분노를 자아로 여긴다면 지혜롭지 않은 정신기울임이 된다. 분노하면 자신도 해치도 남도 해치는 불선업을 짓게 된다. 왜 그런가?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노할 수 있다. 불의를 보고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분노가 되어야 한다. 또한 자비로운 분노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내뜻대로 안된다고 분노하면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2021-04-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