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원한 제거 수단
원한이 생겨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들끼리의 사랑이다. 그들의 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끼리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보편적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어떻게 원수를 대할까? 이는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된다.” (A5.161)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부모를 죽였거나, 형제를 죽였거나, 자식을 죽인 원수를 말한다. 원한 맺힌 자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도 해당된다. 요샛말로 “그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혼한 전처나 전남편이 될 수도 있고, 돈을 떼먹고 도망간 ‘채무자’도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군상은 눈에 흙이 들어 가는 순간에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원한 맺힌 자’ ‘그인간’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한다. 수행을 통하여 원한의 마음까지 제거함을 뜻한다.
원한의 여읨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하여 원한의 마음을 제거한다. 부모, 형제, 자식을 죽인 철천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기 보다 성냄에 뿌리를 둔 원한의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단지 구호에 지나지 않지만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이 제거된다. (tasmiṃ puggale āghāto paṭivinetabbo)”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원한이라고 번역된 말이 ‘āghāto’이다. Āghāto는 ‘Anger, ill-will, hatred, malice’의 뜻으로 성냄, 사악한 의도, 증오, 원한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원한을 원한으로서 제거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원한 맺힌 자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여 원한이 풀리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원한의 여윔으로 그친다 (Averena ca sammanti)”라 하였다. 원한의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비로소 원한이 그친다고 하였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과 다른 것이다. 원수라는 말 자체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다.
‘원한을 여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말과 같다. 성냄에 뿌리박은 ‘원한(verā)’이라는 말은 자애와 반대 되는 말로서, 원한 맺힌 자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낸다고 하여 상대방을 조정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자애의 마음을 방사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였을 때 비로서 원한을 내려 놓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유일신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보다 훨씬 더 수승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애수행은 40가지 사마타수행 중의 하나에 속해 있다.
다섯 가지 원한 제거수단이 있는데
자애에 대하여 언급 될 때 항상 따라 붙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자애와 함께 연민과 기뻐함과 평정이다. 이를 ‘사무량심’이라 한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정형구로 정형화 되어 있다.
그렇다면 원한 맺힌 자에게 원한의 마음을 여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표적인 경이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A5.161)’이다. 그런데 이 경을 보면 사무량심 중에 기뻐함(무디따)이 빠져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만일 기뻐함이 들어 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기뻐함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라고 되어 버릴 것이다. 원한 맺힌 자, 그인간에게 기뻐하는 것이 원한을 여의는 것이다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량심 중에서 기뻐함가 빠지고 그 대신 ‘새김없음(asati)’과 ‘업의 주인임을 반조함’이 추가 되어 모두 다섯 가지 항목이 되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에게 이미 생겨난 원한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한 제거수단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평정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A5.161)
원한을 놓아 버리는데 다섯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방식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이 경의 중요성에 대하여 니까야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 청정도론에서는 “앞서 설한 이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도반들이여, 이것이 적개심을 제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니 비구에게 적개심이 일어나면 이것으로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A.iii.186-90)' 라는 증지부 다섯의 모음에 있는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 āghātapaṭivinayasutta)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Vism9.21) 라 되어 있다. 절복진노경은 앙굿따라니까야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A5.161)’을 말한다. 5세기 붓다고사가 인용하였을 정도로 매우 비중 있는 경이다. 청정도론에서 자애수행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근거가 되는 경으로 활용하였다.
어떻게 연민해야 하나
두 번째 항목에서 연민에 대한 것을 보면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원한 맺힌 자에게 연민을 내어야 할까?
연민이라는 말은 까루나(karuṇā)의 번역어이다. 까루나의 뜻은 ‘compassion; pity’의 뜻이다. 동정, 불쌍함, 애석함 등으로 해석된다. 원수에 대하여 원한의 감정 대신 연민의 마음을 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사귀어야 할 사람의 경(A3.26)’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사귀지 말아야 하고 친하지 말아야 하고 섬기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계행과 삼매와 지혜가 우리보다 저열한데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애를 베풀고 연민을 베풀 뿐, 사귀지 말아야 하고 친하지 말아야 하고 섬기지 말아야 한다.” (A3.26)
계정혜, 즉 계행과 삼매와 지혜가 저열한 자에 대하여 사귀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했다. 그 대신 자애와 연민으로 대해야 함을 말한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도 해당된다. 단지 자애를 베풀고 연민을 베풀뿐 사귀지도 말하고 가까지 하지도 말아야 함을 말한다. 연민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러면 지금 이자가 비록 인간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며칠도 못가서 여덟 가지 큰 지옥이나 열여섯 가지 작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그 사람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연민을 통해 적개심은 가라 앉는다.”(Vism.9.21) 라 되어 있다.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은 그 사람이 불쌍해서이다. 원한 맺힌 자가 신체적으로 또는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그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을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는 어떤 식으로든지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증오한다고 하여 과보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증오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연민해야 한다. 왜 그럴까? 악행을 하여 죄업을 지은 자는 내가 관여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살해 했다면 현생에서도 과보를 내생에서도 과보를 받는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Dhp15)”라 하였다. 이는 자신의 더러운 업을 보고 통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복수를 한다거나 증오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단지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을 것에 대한 연민의 마음만을 내면 된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세 번째 항목에서 ‘원한이 생겼을 때 평정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평온수행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애 등에 대해 세 번째선(禪)과 네 번째 선(禪)을 얻어야 한다. 이미 익숙한 제3선으로부터 출정하여 처음 세 가지 [자애 ․ 연민 ․ 더불어 기뻐함에] 대해 위험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복하기를!’하는 방법으로 중생의 즐거움에 대해 마음에 잡도리함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고, 적의와 찬사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고, 기쁨과 관련되어 거칠기 때문이다. 아울러 [평온의] 고요한(sata) 고유성질을 통해서 평온의 이익을 보아야 한다.”(Vism.9.84)
평온수행은 네 번째 선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애, 연민, 기뻐함 수행은 네 번째 선정에 속하지 않는다. 네 번째 선정에 대한 정형구는 “행복도 고통도 버려지고, 기쁨도 근심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에 든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집중이라고 한다. (S45:8)”이다. 여기서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upekhāsatipārisuddhiṃ)’이라는 말이 있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네 번째 선정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평정하지만 그것은 알아차림이 있는 청정한 상태임을 뜻한다. 지극히 평온하고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한자어로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 한다.
평온의 상태에서는 행복, 기쁨, 근심, 괴로움,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네 번째 선정의 경우 오로지 평온만이 있기 때문에 자애의 마음, 연민의 마음, 기뻐함의 마음 또한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경에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평정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선정수행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평정과 관련하여 영어번역을 보면 “On looking equanimity can be maintained in being toward a person with whom you are annoyed; this too is how annoyance with him can be removed.”(AN 5.161) 라 되어 있다. 여기서 ‘Onlooking equanimity’이라는 말은 ‘방관하는 듯한 마음의 평정’을 말한다. 화를 낸 사람에게 ‘방관하는 듯한 마음의 평정(Onlooking equanimity)’ 을 마음속에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하여 평정의 마음을 닦는 방법이다.
아사띠(asati)에 대하여
네 번째 항목 ‘새김의 놓음(asati)’과 다섯 번째 항목 ‘업의 주인(kammassakatā)’이 있다. 이 두 항목은 원한을 제거 하는데 있어서 매우 특별한 항목이다. 자애, 연민, 평정만으로 원한을 제거 하기 힘들 경우 추가로 더해 지는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두 가지가 추가 되었을까? 먼저 ‘새김의 놓음(asati)’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 도처에서는 사띠(sati)를 강조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사띠가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알아차림(sati)이다. 그런데 원한의 마음을 제거 하는데 있어서 알아차리자 말자고 한다. 그래서 “새김을 놓아 버리고(asati)”라고 하였다.
‘새김을 놓는다’는 말이 ‘asati’이다. 그런데 이 말은 ‘amanisikāro’와 함께 쓰여 “asati amanisikāro”라 되어 있다. 이는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라고 해석된다. 이 구절에 대한 청정도론의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맛지마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관련된 구절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관찰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거룩한 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고, 참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참사람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들은 정신을 써야 할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은 정신을 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므로,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는다.” (M2)
‘모든 번뇌의 경(M2)’에 따르면 번뇌가 발생하는 요인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 된다. 그럴 경우 번뇌만 증가 될 것이다.
아사띠에 대한 영어번역을 보면 “The forgetting and ignoring of a person with whom you are annoyed can be practiced; this too is how annoyance with him can be removed.” (AN 5.161) 라 되어 있다. 여기서 키워드는 ‘잊어 버리는 것(forgetting)’과 ‘무시하는 것(ignoring)’이다. 그래서 화를 낸 사람에게 ‘잊어 버리는 것(forgetting)’과 ‘무시하는 것(ignoring)’의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원한의 마음을 내지 않으려면 ‘원한 맺힌 자’ 또는 ‘그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asati amanisikāro tasmiṃ puggale āpajjitabbā)”라고 하였을 것이다.
원한 맺힌 자 또는 ‘그인간’을 생각하면 화가 솟구쳐 오른다. 그사람 이름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그래서 증오의 마음이 일어나고 증오의 마음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마치 폭주 하는 기관차처럼 마구 불선한 마음으로 가득해진다. 그렇다고 하여 상황이 변화 되는 것은 아니다. 증오의 마음을 가짐으로 인하여 자신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이는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뇌가 일어난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의 반조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항목에 ‘업의 주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kammassakatā’의 번역어이다. 빠알리어 깜맛사까따는 ‘행위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행위에 대한 책임성’을 의미한다.
누구나 행위를 하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 그런 행위는 좋은 행위도 있고 나쁜 행위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행을 하면 선과보를 받고, 악행을 하면 악과보를 받는 것은 인과법에 따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지은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증오심을 낸다는 것은 증오심을 낸 것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우연히 마주쳤을 때 어떤 생각이 날까? 부모나 형제, 자식을 해친 자라면 그 자리에서 해칠 지 모른지다. ‘그인간’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그래서 “죽일놈!”이라 고 소리치거나 생각으로 살해하는 것을 연상한다면 이는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불선업은 불선업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된다. 이는 자신이 행위에 대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원수를 저주하고 증오의 감정을 내비친다고 하여도 결국 자신이 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과보는 마땅히 받아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사람에 대하여 나쁜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A5.161) 라고 되어 있다.
자애수행의 궁극적 목적
다섯 가지 원한 제거 수단에서 가장 핵심은 자애수행이다. 그렇다면 자애수행을 하는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자애수행을 함으로 인하여 나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원한 맺힌 자에게 증오의 마음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낸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편해진다.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분노가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상태가 됨을 말한다. 그래서 자애수행은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의 하나이다. 이런 자애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āvuso vyāpādassa yadidaṃ mettācetovimutti
“존자여, 분노를 여의는 것이 곧,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입니다.” (A6.13)
이 구절을 보면 자애수행을 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분노를 여의는 것이다. 분노의 여읨으로 해탈하는 것이다. 이를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mettācetovimutti: 慈心解脫)’이라 했다. 자애수행을 하는 것이 남의 마음을 움직인다거나 내 뜻대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의 마음을 냄으로 인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만들어 해탈코져 하는 것이다.
자애수행을 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많다. 앙굿따라니까야 ‘자애공덕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모두 열 한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고, 귀신들에게조차 사랑을 받고, 신들이 보호해주고, 불이든 독약이든 거의 해를 입지 않고, 빠르게 삼매에 들고, 안색이 맑고, 당황함이 없이 임종에 들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A11.15)
자애수행을 닦아 자심해탈하여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자애수행을 한 공덕은 매우 크다. 이에 대하여 열 한가지 이익이 소개 되어 있다. 이 중에 “신들이 보호해 주고”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애의 마음을 닦으면 신들이 수호해 줌을 말한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일지라도 “모든 중생들이 진실로 행복하기를!(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 stn145)”이라고 자애의 마음을 낸다면 신들도 감동하여 수호해 줄 것이라 했다.
2016-07-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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