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되돌이킬 수 없는 갈애의 루비콘 강

담마다사 이병욱 2018. 4. 2. 08:49


되돌이킬 수 없는 갈애의 루비콘 강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케이블채널에서 본 영화 대사입니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 했지만

살아 남은 곳도 있었습니다.

 

거기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스무 살도

안되는 앳된 처녀입니다.

모두 떠나버린 텅 빈

마을에서 혼자 살아 갑니다.

 

중년의 사내가 등장합니다.

용케 살아남은 엔지니어 입니다.

그런데 매우 지혜롭습니다.

마을에서 둘이 돕고 살아갑니다.

 

어느 날 여인은 술에 취했습니다.

본능을 절제 하지 못합니다.

내가 잘못 한 걸까요?”라고 말합니다..

이에 남자는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합니다.

 

남녀관계는 미묘합니다.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에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됩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라고.

 

지혜로운 중년 남자는

철모르는 여인을 설득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갔습니다.

영화 최후의 Z(2015)’에서 본 것입니다.

 




중학교에 처음 들어 갔을 때

모든 것이 달라 보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군대에서도, 입사할 때도 그랬습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결혼입니다.

장군이 되는 것보다 변화가 훨씬 더 많습니다.

여기에 자식까지 생기면

그 변화는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모든 것은 갈애(tahā)로 부터 시작됩니다.

갈애는 느낌(vedanā)을 조건으로 합니다.

즐거운 느낌이나 싫어하는 느낌입니다.

좋으면 거머쥐려 합니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자신도 모르게 넘어갑니다.

오로지 앞으로만 맹목적으로 갈 뿐입니다.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처럼,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한 것처럼.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Dhp.153)

 

 

집을 짓는 자는 갈애입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세세생생 윤회하는 동력이

바로 갈애임을 밝혀 냈습니다.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154)

 

 

이것이 부처님의 오도송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가 된 것입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납니다.

갈애가 생겨나면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폭류가 되어 흘러 갑니다.

이를 일러 윤회(sasāra)라 합니다.

 

갈애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만든 것을 알았기에 허물었습니다.

번뇌라는 서까래가 무너지고

개체(自我)라는 대들보가 무너졌습니다.

 

새벽이 되면 평온합니다.

어제 잘 못 산 자들은 괴로울 것입니다.

청정하게 산 자들에게

새벽에 맞는 평온은 축복입니다.

 

평온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무덤덤한 것은 아닙니다.

선정에서 평온은 사띠(Sati)가 있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듣던 말이 있습니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립시오.’라고.

이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눈이나 귀 등으로 온갖 대상을 접할 겁니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되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겁니다.

 

 

 

2018-04-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