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흑자인생으로 전환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16. 15:53

 

흑자인생으로 전환하기

 

 

정치의 계절이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마음 한구석에는 정치가 자리잡고 있다. 유튜브시대에 입맛에 맛는 유튜버를 찾는다. 이럴 때 하는 말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매번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운다. 유리한 이야기는 즐거워 하고 불리한 이야기를 접하면 우울해 한다. 이런 것으로 본다면 정치적 동물임에 틀림없다. 가능하면 정치와 불가원불가근(不可遠不可近)하려 하지만 요즘 같은 경우 가근(可近)이 되는 것 같다.

 




인생구분을 나눈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아마도 정치도 큰 요인을 차지할 것 같다. 전두환의 오공시절부터 시작하여 현재 문재인정부에 이르기까지 인생도 시대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인생의 높낮이그래프를 그린다면 민주정부시절에는 상단에 있고 반대로 보수정부시절에는 하단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인생의 대차대조표가 있다. 연령대별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본다면 흑자이었던 때도 있고 적자이었던 때도 있을 것이다. 민주정부 십년동안은 침체기였다.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암울한 시기였지만 그래도 민주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플러스마이너스제로였다고 본다. 보수정부 십년동안은 나름대로 성과를 낸 시기였다. 인생의 방향을 잡아 그 길로 주욱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정권 십년은 불편한 시기였다. 이렇게 본다면 역시 플러스마이너스제로라고 볼 수 있다.

 

크게 성공한 것도 없고 크게 실패한 것도 없다.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흑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닌 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한 것이 더 많을까, 불선(不善)한 것이 더 많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불선한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그것은 모르고 지은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가 있다.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일까? 세상에서는 알고 지은 죄가 더 나쁘다고 한다. 살인을 해도 우발적 살인과 계획적 살인은 형량이 다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르고 지은 죄를 더 크게 본다. 과보를 생각하지 않고 짓는 죄가 더 무거운 것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과보가 따를 것임을 안다면 큰 죄는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업의 가르침에 무지한 자는 아무 생각없이 저지를 것이다.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저질렀을 때 중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무명이 대죄이다.”라고 했다.

 

그 동안 지은 불선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것이 많다. , , 치로 사는 것이 불선업을 짓는 것이다. 탐욕의 마음을 내었다면 불선업 짓는 것이 된다.

 

일하다가 맑은 하늘을 쳐다 보며 날씨 참 좋네.”라며 말 하는 것도 불선업이 된다고 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형상에 끌리는 것도 불선업이 된다. 욕망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악에 심취해서 자꾸 듣는 것도 불선업이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이는 업과 업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꽃 향기에 취해서 코를 대는 것도 불선업이 된다. 주지 않는 것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도둑이네. (S9.14)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탐심이 불선업이라면 분노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욕심이 나는데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충실한 삶을 정당화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탐심이나 분심 모두 불선업으로 본다. 당장 천수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천수경에 십악참회가 있다. 열 가지 중에는 탐애중죄금일참회가 있다. 탐착하고 애착하는 것이 큰 죄임을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죄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을 말한다. 천수경에서는 치암중죄금일참회라 하여 어리석음을 중죄라고 했지만, 니까야에서는 삿된 견해를 갖는 것이 중죄라고 분명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는 잘못된 견해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라고 합니다.”(M9.7)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것이다.

 

사견을 가지면 구제받기 힘들다. 한번 생각이 굳어지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이교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견을 가지면 악처에 떨어진다고 했다. 심지어 부모를 살해하는 등 극악무도한 오무간죄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다.

 

모르는 것이 큰 죄이다. 무지한 자를 말한다. 무엇에 무지한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성제에 대한 무지이다. 그래서 팔정도에서는 정견에 대하여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사성제를 모르면 무지한 자가 된다. 왜 그런가? 사성제는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지금 괴로운 것은 결과로 나타난 과보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고성제이다. 결과는 원인에 따른 것이다. 과거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어서 괴로움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일까? 멸성제에 따르면 명백하다. 그것은 갈애 때문이다. 그런 갈애는 감각적욕망의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라고 했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괴로움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욕심내고 분노하면 괴로움으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선업을 짓는 결과가 된다. 이렇게 사성제는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결과라는 이지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 더 확장한 것이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는 십이연기이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는 결국 연기법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 원인(hetu: )과 조건(paccya: )과 결과(phala: )라는 연기법을 모르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몰라서 큰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 대죄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죄를 많이 지었다. 몰라서 지은 죄이다. 욕심 내는 것이 죄인 줄 몰랐고 화내는 것이 역시 죄가 되는 것 인줄 몰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죄를 짓고 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불선업을 짓는다. 그래서 늘 알아차림(sati)하라고 했는가 보다.

 

육십비인생(六十非人生)’이라는 말이 있다. 육십이 되어서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니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몰라서 불선업만 짓고 산 것이다.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적자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흑자인생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욕심내는 것도 죄가 되고 화 내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수행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등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남은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왔는데 흑자전환하기에는 앞으로의 삶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더구나 수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오늘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지금 이 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 적자투성이의 인생을 안고 갈 것이다. 빚만 잔뜩 짊어지고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 수다원이 되어 있다면 안심할지 모른다. 수다원이 되면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중죄는 짓지 않기 때문이다. 알고 지은 죄는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오늘 밤까지만 살아야 한다. 하루를 일생처럼.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1)

 

 

2020-03-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