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불교인의 현실참여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5. 26. 07:47

 

 

불교인의 현실참여에 대하여

 

 

 

 

 

댓글을 받았다. 다짜고짜 받은 댓글은 제발 개떡 같은 철학은 하지마라. 사실 그대로 알고서 이야기 해라, 좀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싶으면 경전 이야기만 해라. 세상일에 대한 너의 생각을 왜 부처님 말씀을 가져다 붙이느냐.”라고 되어 있다. 거의 욕설에 가깝다. 이런 댓글에 승인을 누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불선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개하는 것은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총무원장직선제와 관련된 글을 연일 올리고 있다. 글이 많아지다 보니 한국불교백년대계라는 방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욕설에 가까운 댓글을 받은 것은 최근 올린 총무원장직선제는 명분이 있어야(2016-05-24)’라는 제목의 글에서이다. 댓글을 올린 이는 점 세개(…)’님이다.

 

사람 사는 곳에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보수적이고 또 어떤 이는 진보적이다. 정치적 견해 뿐만 아니라 종교,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견해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딧티(diṭṭhi)’라 한다. 영어로 View라 한다. 관점이라 볼 수 있다.

 

불교에서 견해는 사견으로 간주된다. 삿된 견해라는 뜻도 있지만 빗나간 견해라는 뜻도 있다. 과녁을 빗나간 화살과 같은 것이다. 반면 정견이 있다. 정확하게 과녁을 맞춘 견해를 뜻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은 모두 정견에 해당된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하고 있다. 때로 현실문제에 대해서도 다룬다. 사람 사는 곳에 늘 갈등과 긴장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해법을 찾아 보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사상의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 함에 따라 때로 심하게 공격을 받기도 한다. 가르침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갈등을 접할 때 마다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해답이 보인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방대한 8 4천 법문이 해답인 셈이다. 그렇다고 8 4천 가지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늘 결론은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였을 때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최근 총무원장직선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관심 있는 법우님들의 동참도 유도하고 있다. 이는 한국불교 100년 대계를 위하여 명분 있는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취지로 작성된 글이 총무원장직선제는 명분이 있어야라는 글이다. 이 글은 총무원장직선제 추진 모임 카톡방에도 올려졌다.

 

누구든지 견해를 말할 수 있다. 특히 익명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시대에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설에 가까운 것이라면 구업을 짓는 것이 된다. 설령 그 말이 정당성을 갖더라도 정어가 되어 있지 않으면 분노의 욕설에 지나지 않는다.

 

다종교 사회에서 한국불교의 위상은 점차 낮아지고 관심은 멀어져 가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청정하지 못함에 있다. 도박, 음주 등 세간에서 들려 오는 갖가지 추문으로 인하여 불자로서 낯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한국불교가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날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하고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경전을 열어 본다. 그때 마다 키워드는 청정이다. 청정한 삶(brahmacariya)를 말한다. 무소유의 청정한 삶을 살게 되면 한국불교가 종교시장에서 가장 강한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대부분 스님들은 청정하게 산다.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 그리고 일선 포교현장에서 발로 뛰는 스님들은 수행과 포교라는 출가자로서의 본분사를 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사로 잡힌 권력승들로 인하여 한국불교가 오물장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런 사실에 침묵할 수 없다.

 

율장을 보면 수행승의 일탈에 대하여 비난하는 장면이 나온다. 잘못을 범한 수행승들에게 사람들은 분개하고 비난하고 혐책했다.”라는 정형구를 말한다. 청정한 삶을 살기로 맹세한 수행승이 잘못을 범했을 때의 허물에 대하여 하늘의 구름으로 비유했다. 수행자의 허물은 일반사람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하고 가혹함을 말한다. 그래서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 (S9:14)라 한 것이다.

 

불교가 좋은 것임을 알기에 현실참여 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수승함을 알기에 불교를 지키고자 한다. 잘못 된 것을 바로 잡고자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침묵한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경우도 많다.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닥칠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더구나 현실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경전에 근거하여 글쓰기 할 뿐이다.

 

 

2016-05-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