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시대에
배신의 아이콘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콘이라는 말은 상징으로 뜻합니다. 컴퓨터에서 원도우마크라든가 휴지통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미지로 상징화된 것을 말합니다. 정치의 계절에서 배신의 아이콘 하면 정치인 ‘전여옥’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전에 대변인을 장기간 지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주군과 같은 인물을 맹비난하며 정계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책 등을 통하여 잘못된 것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은 주군을 배신한 전여옥에 대하여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습니다.
오랜 만에 전여옥을 종편채널에서 보았습니다. 지금은 평벙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토록 맹비난했던 것들이 들어 맞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편에서는 배신했다고 맹비난 했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서야 실체를 안 것에 대하여 뒤늦은 후회를 하며 배신의 아이콘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합니다.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촛불집회가 이제 네 번째를 맞았습니다. 첫 번째 촛불집회 때 참석했습니다. 아주 작은 촛불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예상 한 것 보다 열 배나 되는 사람들이 왔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촛불집회에 대하여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쳤건만(2016-10-3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촛불집회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늘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전에 외롭게 촛불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선수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주류입니다. 남녀가 따로 없고 노소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촛불을 든 모습은 장관입니다.
촛불파도타기를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질서를 존중한다는 사실입니다. 백만이 모였어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튜브에서 본 일본동영상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의식수준에 놀라고 있습니다. 더구나 공연하며 즐기는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꺼지지 않는 LED촛불
사람들의 관심사는 온통 시국에 쏠려 있는 듯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 모임에서도 차담 할 때 시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방송에서는 새로운 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자고 나면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런 와중에 어느 극보수인사는 “촛불은 시간이 지나면 꺼지고 맙니다.”라 했습니다.
촛불은 언젠가 꺼지고 말 것입니다. 당연한 이치로 받아 들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게 변해 가는데 촛불이라고 영원히 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극보수의 말에 반발도 많습니다. 어떤 이는 ‘횃불을 들겠다’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꺼지지 않는 ‘LED촛불’을 사용할 것이라 합니다.
LED촛불이라는 말에 필이 꼽혔습니다. 어느새 세상은 LED의 천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곡면의 모니터도 LED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LED라는 말은 전자용어로서 ‘Light Emitting Diode’의 약자입니다. 전자공학 전공자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다이오드에 전류를 흘리면 빛을 발산하는 반도체를 말합니다. LED촛불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전지가 필요합니다.
LED를 이용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년 3월에 열리는 불교박람회에서는 LED로 만든 촛불을 볼 수 있습니다. 전류를 흘려서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촛불이 흔들리는 모양도 구현할 수도 있습니다. LED촛불을 사용하면 법당의 화재의 위험도 적고 반영구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연등축제에서도
LED의 위력은 연등축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금년 5월 해미읍성에서 연등축제가 있었습니다. 서산의 사암연합회에서 주관한 것입니다. 천장사신도들과 함께 참여 했습니다. 그런데 연등이 모두 LED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연등 안에다 초를 넣고 불을 붙이는 식이었는데 시대가 바뀜에 따라 LED로 대체 된 것입니다.
LED연등은 환상적입니다. 형형색색의 창호에 불이 밝혀지면 오색찬란한 색깔이 나옵니다. 낮에는 알 수 없으나 밤이 되면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오색연등이 이제 LED로 천하통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LED촛불을 판매한다면
촛불집회에 가면 촛불을 볼 수 있습니다. 갈수록 대형화 되는 촛불집회에서 촛불은 어떻게 마련하는 것일까요? 집에서 준비해 오기도 할 것입니다. 종이컵과 양초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촛불집회 현장에 가면 촛불을 팔기도 합니다. 한 개에 천원 합니다.
촛불집회장에 가면 삶의 현장도 보게 됩니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점상들이 그것입니다. 오뎅도 팔고 커피도 팝니다. 그 중에는 촛불을 만들어 파는 노점상도 있습니다. 아마 백만촛불을 대상으로 누군가 LED촛불을 판매한다면 불티나게 팔릴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
다시 배신의 아이콘으로 되돌아 옵니다. 배신자라는 말은 부정적입니다. 대신에 ‘충성’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들립니다. 배신과 충성, 이 두 가지 말은 극과 극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일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작년 재가단체에서 활동한 바 있습니다. 약 4개월 정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처음 접한 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단체를 이끌고 있는 자의 리더십입니다. 밖에서 알고 있었던 것과 실제로 접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 때문에 입씨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정도 밖에 안됐나?”라며 실망했습니다. 결국 재가단체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배신한듯한 기분이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불편한 마음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거의 대부분 답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분에게 매우 감명있는 글을 받았습니다. 젊은 변호사인데 “저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 했습니다. 이 말에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편한 마음에 동조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중립적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담담하게 표현 한 것이었습니다.
살다 보면 견해가 달라 충돌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자주 충돌하다 보면 이혼하게 됩니다. 단체에서 의견차이로 충돌이 일어 났을 때 뛰쳐 나가기도 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배척한다면 이 세상은 홀로 사는 사람들로 넘쳐 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점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도 있습니다. 장점이 있기에 함께 살아 갑니다. 그런데 젊은 변호사는 “저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 하여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광팬과 안티의 차이는?
언젠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에게 한 사람이 찾아 왔다고 합니다. 스님의 책과 강연을 보고서 감명을 받아 오늘부터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님은 거절했다고 합니다. 한면만 보고 열열히 원했을 때 실망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마치 광팬이 안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연예인들에게는 팬이 많이 있습니다. 팬클럽도 있어서 특별히 관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밝은 곳이 있으면 어두운 곳도 있다고 광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팬 있는 곳에 반드시 안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안티가 생겨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관심’이라고 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을 때 손바닥 뒤집는 것 보다 쉽게 배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욕망과 집착에 따른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제자 되기를 자청하는 자에게서 욕망과 집착을 본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런 일을 당해 보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라 합니다.
스승을 선택할 때
세간에서는 단점이 있어도 장점이 있기에 살아 갑니다. 그러나 출세간에서는 다릅니다, 단점이 있으면 내치는 것입니다. 스승을 선택할 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자를 고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스승을 선택할 때 먼저 “당신은 탐욕에서 벗어났습니까?”라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벗어났다고 말하면 스승으로 삼아도 좋습니다. 왜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뢰’의 문제입니다.
스승을 선택할 때 탐, 진, 치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알아 보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간에서 리더를 따르는 것과는 다른 양상입니다. 여로 경로로 조사해서 알아 보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스승에 대한 ‘믿음’입니다.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그는 그를 조사해서 어리석음의 현상에서 벗어나 청정한 것을 알았으므로, 거기에서 그에게 믿음이 확립되고, 믿음이 확립되면 존중하게 되고, 존중하면 섬기게 되고, 섬기면 청문하게 되고, 청문하게 되면 가르침을 배우게 되고, 배우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새김이 생겨나고, 새김이 생겨나면,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게 되고, 의미를 고찰하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고,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면, 의욕이 생겨나게 되고, 의욕이 생겨나면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면 깊이 관찰하게 되고, 깊이 관찰하면 정근하게 되고, 정근하면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마침내 지혜로써 꿰뚫어 보게 됩니다. 바라드와자여, 이렇게 진리는 깨달아지고, 이렇게 진리를 깨닫습니다.”
(M95, 전재성님역)
진리의 길을 가는 자에게 있어서 스승의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미심쩍은 것이 있거나 깨름찍하다면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겨야 믿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데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믿음의 마음을 내었을 때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됩니다. 경에 따르면 믿음에 이어 존중, 섬김, 청문 순으로 진행 됩니다. 스승이 말한 것을 잘 새겨 듣고, 사유하고, 실천 했을 때 마침내 최상의 진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배신의 시대에
배신의 시대입니다. 자신과 견해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SNS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살펴 보면 장점도 있습니다. 장점을 생각 했을 때 함께 할 만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그 사람이 한번이라도 성내는 모습을 보였다면 멀리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단 한번이라도 욕심부리는 것을 보았다면 역시 멀리 할 수 있습니다.
세간에서는 “저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는 말이 커다란 가르침으로 다가 옵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진리의 세계에서는 탐, 진, 치에 오염되었는지를 따집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을 갈 때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나은 자와 함께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욕망과 분노로 가득한 어리석은 자와 함께 길을 가느니 외롭지만 차라리 고독하게 홀로 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2016-11-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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