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까지만
이빨 치료가 끝난지 이틀이 되었다. 새 이를 씌우는 것을 끝으로 십일간의 치료가 완료된 것이다. 이제 치통도 없고 양 이빨로 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가 튼튼한 것이 오복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치통으로 인하여 지옥을 맛보았다. 잠 잘 때를 제외하고 하루 종일 치통에 시달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치통이다. 굳이 말로 한다면“닥근닥근 거린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마치 통증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매우 강렬했다. 파고도 높았다. 마치 덮칠 듯한 통증의 파도에 속수무책이었다. 통증을 알아차림 해 보려고도 노력했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2의 화살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압도하는 통증에 당해낼 수 없었다.
통증은 5월 24일 일요일 광주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월요일 오후 4시 치과예약이 된 상태였다. 어쨌든 버텨야 했다. 망월동 구묘역에서 김동수열사 추모제가 열리는 내내 통증과 싸워야 했다.
열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생각한다면 이런 통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죽음보다 더 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고통이 크면 사회적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구보리하화중생’이라고 했을 것이다. 또 ‘자리이타행’이라고 했을 것이다.
치통은 고통 그자체이다. 이를 ‘고고성(苦苦性)’이라 해야 할 것이다. 통증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육체적 통증 그 자체를 말한다. 치통, 두통 등 갖가지 통증이 있다. 이럴 때 아픔을 느낀다. 그런데 치통 못지 않게 슬픔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실에 따른 것이다.
치과 엑스레이 영상을 보니 이제 남아 있는 내이는 별로 없다. 아래 니의 경우 앞에 몇개를 제외하고 모두 씌어져 있다. 20여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그때마다 치과수술실 침상에 누웠다. 치료할 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특히 사랑니를 뺄 때는 지옥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힘들다. 이후 씌우는 것은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되었다. 기술이 발전되어서일까 큰 통증 없이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씩 내 이가 사라져서 몇 개 남지 않았을 때 슬픔을 느꼈다. 상실에 대한 슬픔이다. 이를 괴고성(壞苦性)이라 해야 할 것이다. 변화해 감에 따른 괴로움이다. 또 무너져감에 따른 괴로움이다.
요즘 이를 철저히 닦고 있다. 식사하고 나면 반드시 닦는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저녁에 한번 닦았다. 닦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 댓가는 썩은 것으로 나타났다. 치통이 따랐다. 결국 치과신세가 되어서 수술실 침상에 눕게 된 것이다. 치통으로 아픔을, 부서짐으로 슬픔을 겪었다. 나머지 이를 지키려면 열심히 닦아야 한다.
이가 하나 둘 교체 되는 것을 보자 살 날이 많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가 모두 빠져 버린다면 음식을 씹을 수 없어서 살 수 없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먹으려면 씹어야 한다. 그런데 씹을 수 없다면 몸을 유지할 수 없다. 죽음이 머지 않은 것이다. 인간수명 백세를 바라보는 시대라고 하지만 이빨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늙어 감에 따라 몸은 점점 부서져 간다. 마치 자동차부품 교체하듯이 몸에 칼을 댔을 때 수명이 다 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그 오랜 세월동안 무엇으로 살았을까?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삶을 산 것이다.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이유가 없는 삶이다. 태어 났으니 살아 가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행위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가 단절의 순간이 오면 어떤 생각이 들어 갈까?
마라나누사띠가(marananusati) 있다. 사수념이다. 죽음을 계속 생각하는 명상을 말한다. 사마타 40가지 명상주제 중의 하나이다. 왜 죽음을 계속 알아차림 하라고 했을까? 이는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는 죽음의 명상 문구에 있다.
나의 삶이 불확실 하다는 것은 언제 단절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이 될 수 있다. 아니 한시간 후가 될 수 있다. 단절되는 순간 “아직도 해야 될 일이 많은데.”라며 후회할지 모른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보면 본수행에 앞서 예비수행으로서 마라나누사띠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라나누사띠를 하면 여러 이점이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수십페이지 걸쳐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늘 죽음을 생각하면 “오늘 밤까지만 살자.”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내일 일은 알 수 없다.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불확실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죽음이다. 그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오늘 밤 까지만 사는 것이다.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 오늘만 있을 뿐이다. 오늘 하루뿐인 인생이라면 헛되이 보낼순 없다. 짧은 하루 동안 남겨야 한다. 글을 쓰는 이유이다. 글을 남기는 것이다. 글을 남겼을 때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기카톡방에 글을 남겼다. 블로그 누적조회수 7백만명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책 11권 낸 것과 앞으로 100권을 목표로 한다는 글도 올렸다. 대부분 침묵하는 가운데 한친구가 반응을 보였다. 그 친구는 “축하한다. 매 순간을 치열하고 사색하고 맹렬하게 정진해 온 삶이로구나.”라며 글을 남겼다.
그 친구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무역을 해서 큰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는 등록금이 없어서 방학때 공사판에서 일했다. 자갈 등이 든 질통을 매고 속된 말로 쎄가 빠지게 일도 한 것이다. 그런 헝그리정신이 있어서일까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 친구에게 “책 한권은 아파트 한채와 같은 가치가 있다.”라고 글을 남겼다.
아침 해가 밝았다. 또 하루가 시작된다.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신체의 각부위는 점점 부서질 것이다. 이빨도 어느 때인가는 썩어 있을 것이다. 이빨을 교체하면서 또 아픔과 슬픔을 느낄 것이다. 또 어느 때인가 뒤돌아 보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가서 볼 일이다.
그때의 일은 그때의 일일뿐이다. 이미 지나간 일도 그때의 일일뿐이다.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때의 조건과 지금의 조건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그때 가서 볼 일이다. 미리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 없다. 그리고 막연한 기대도 할 필요가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일생을 하루처럼 사는 자에게는 하루가 지나가도 여한이 없다.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것이다.
내일 태양이 떠오를지 안떠오를지 알 수 없다. 시간이 없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글쓰기를 마치면 해야 할 일을 다한 것 같다.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친 사람에게는 내일은 없다. 남는 시간은 덤이다. 이빨을 고치고 나니 더 이상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다.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더 이상 내일을 바라지 않는다. 오늘밤까지만 사는 것이다.
2020-06-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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