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침묵이 똥일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7. 29. 08:25

침묵이 똥일 때

 

 

흔히 침묵을 금이라고 말한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말을 적게 하라고 한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할 수도 있다. 말로 인하여 구설수에 오른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어는 폭력일 수 있다. 개념화된 언어로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말로 표현 했을 때 자르는 것이 되어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앞뒤 잘라서 따옴표 처리했을 때 폭력이 된다. 전혀 사실과 다른 말이 되어 버렸을 때 언어폭력이 된다. 조선일보가 하는 방식이다.

 

언어가 폭력적임에도 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없다. 인류문명은 언어가 있어서 발전되어 왔다. 언어가 있어서 문명이 있었다. 언어가 있어서 학문과 기술이 발전되었다. 언어가 있어서 소통하게 되었다. 언어가 없었다면 동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언어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소통수단에 언어 만한 것이 없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자신의 선에서 끝날 것이다. 공유가 되지 않음을 말한다. 언어가 없으면 공감할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출하지 않으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요즘은 소통의 시대이다. 인터넷과 정보통신기기의 발달로 인하여 모든 것이 손안에서 소통되기에 이르렀다. 손안의 스마트폰만 있으면 심지어 언제 어디서나 이체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시대이다. 카톡과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앤에스(SNS)가 대표적이다. 주로 문자메세지로 소통한다. 불과 20여년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시간 소통시대에 살고 있다. 요즘은 직접대면하는 것보다는 비대면 접촉이 더 많다. 전화를 걸어서 목소리로 통화하는 것보다는 문자메세지를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부부사이에도, 부모자식간에도 카톡을 주고받는다.

 

실시간 소통시대에 전화 걸 일이 별로 없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전화통화하지 않는다. 그대신 문자메세지를 날린다. 문제는 소통이다. 문자를 보냈음에도 답신을 하지 않으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실시간 소통시대에 문자는 대화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문자를 보냈으면 실시간으로 답신 하는 것이 실시간 소통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예의일 것이다. 그럼에도 두 번, 세 번 보냈음에도 답신이 없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가장 먼저 무시당했다.”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문자를 씹는다.”라고 말한다. 답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속어이다. 씹고서 뱉어 내지 않았을 때 무슨 속인지 알 수 없다. 문자를 보지 못했을수도 있을 것이다. 카톡으로 소통하면 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자메세지의 경우 보았는지 알 수 없다. 아직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위안해 본다. 그러나 스마트폰 시대에 문자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론은 무시당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카톡은 하지 않아도 문자메세지는 주고받는다. 문자를 보냈음에도 답신이 없다면 갖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무시당했다고 오해하게 할 수 있다. 귀찮아서 답신하지 않았을 때 이는 소통거부가 된다. 친구 하지 않겠다는 말로도 볼 수 있다. 만일 거래처에서 고객이 문자 보냈다면 그 문자를 씹을 수 있을까?

 

문자를 씹는다는 것은 하찮게 보기 때문일 것이다. 무시해도 되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소통하지 않게 되었을 때 관계는 악화된다. 마음속에 상처로 남게 된다. 실시간 소통시대에 문자를 씹는 행위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침묵은 금이 아니라 침묵은 똥이 된다.

 

 

2020-07-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