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 천번 참회하는 것 보다
가슴에 못을 박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도 대못을 박는다는 말이 있다.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면 못이 박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恨)이 될 수도 있다. 때로 분노로 표출된다.
한은 홧병이 될 수 있다. 홧병이 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갖으면 그 사람은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사기꾼의 특징
모든 거래는 결재함으로써 완료된다. 물건을 사면 돈을 지불하듯이, 계산서를 작성하면 상대방에서 송금해 주어야 거래가 끝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았을 때 뒤탈이 없다. 깨끗이 잊어버린다. 이에 대하여 업을 짓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벌써 그 업체와 거래한지 1년이 넘었다. 그 회사는 아직도 잔금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 때가 되어 독촉메일이나 독촉문자를 보내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러나 언제 줄지 모른다.
또 한업체가 있다. 이 업체는 약 9개월 되었다. 처음 착수할 때 착수금을 주었지만 잔금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 문자를 보내면 곧 보내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말은 번지르하게 하지만 한번도 약속을 지킨 적이 없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사기꾼은 약속은 번지르하게 잘 하지만 약속은 지키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미결(未決)인 채로 남았을 때
개인사업자로 13년 살고 있다. 그동안 세금계산서 발행한 것은 수 백건이 된다. 크고 작은 계산서는 결재가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거래가 종료된다. 거래가 종료됨과 동시에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업으로 남아 있지 않음을 말한다.
사업을 하다 보면 오래 도록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결재가 안된 경우이다. 미결인 것은 아무리 오래 된 사건이라도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 무덤까지 가져 가게 될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못을 박아 놓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액수가 크다면 대못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손해에 대하여 민감하다. 돈을 빌려 간 사람은 잊어 버릴지 모르지만 끝까지 기억하고 있다. 설령 만원짜리 한장이라도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다. 가슴에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업(業)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돈 만원을 빌려 간 사람은 잊어 버렸을지 모르지만 상대방의 가슴에는 여전히 미결(未決)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군대에서
흔히 선업과 악업을 말한다. 선업을 지으면 선과보를 받고, 악업을 지으면 악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는 인과의 법칙이 엄중하게 작동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상대방에게 폭행을 하거나 언어폭력을 행사했을 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즉각 반격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업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원한으로 증오로 남아 있는 한 언젠가 과보를 받게 된다.
나의 기억에서 남아있지 않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악업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런 생각없이 했던 것 같다. 무지에 바탕을 둔 행위이다. 불교를 알았더라면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행위의 두려움과 윤회의 두려움을 알았다면 악업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서 했던 것이다. 특히 군대에서 그랬다.
군대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집합”이라는 말이다. 저녁식사후에 옥상에 집합하라는 말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밥맛이 없다. 얼차려는 물론 구타를 당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나쁜 관행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후임이 고참이 되면 이런 행위를 답습한다.
사람들은 쉽게 폭력적인 악습에 물들게 된다. 그래서 악업이 되는지도 모르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당한 사람의 마음에는 남아 있다. 평생 가도 잊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그때 당시 후임들의 얼굴이 떠오르면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든다. 만나면 무릎 꿇고 참회의 말을 전하고 싶다.
업을 즉시 치유하려면
불교에 참회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또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말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참회한다면 자신의 응어리는 풀어지겠지만 상대방의 응어리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상대방의 응어리를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찾아 가서 용서를 비는 용기를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성자를 비방한 젊은 수행승이 있었다. 수행승은 장로가 쭈그리고 앉아 탁발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서 “배고픔에 아주 사로잡혀 노장이 우리에게 창피한 일을 행한 것이다.”(Vism.13.84)라고 말했다. 이 말을 장로가 듣게 되었다.
장로는 젊은 수행승에게 “벗이여, 그대는 이 교법에 정립되어 있는가?”라며 물었다. 이에 수행승은 “존자여, 그렇습니다. 저는 흐름에 든 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로는 “그렇다면, 그대는 보다 높은 길을 위해 애쓰지 말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장로는 “그대는 번뇌를 부순 님을 비방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젊은 수행승은 즉시 참회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이 대목에서 “그래서 그의 업은 즉시 치유되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젊은 수행승이 무심히 뱉은 말은 업이 되었다. 아라한인 장로의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수행승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아라한은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비방하는 말을 들었어도 단지 그런 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는 자비심이 있었다. 아직 예류자에 불과한 젊은 수행승에게 더 이상 업을 지어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참회는 면전에서
장로는 언어적 행위가 업이 된 것인줄 모르는 젊은 수행승에게 참회하도록 했다. 이는 모르고 지은 업을 털어내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런데 이런 케이스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업을 지었을 때 어떻게 참회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직접 대면하여 참회하는 것이다. 연장자이든 연소자이든 구업을 지었으면 당사자에게 참회의 말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연장자라도 자신보다 더 고귀한 자라면 “나는 존자에 대하여 이러이러한 말을 했는데, 용서해 주게.”라고 참회해야 한다. 자신이 연소자라면 “존자여, 제가 존자에 대하여 이러이러한 말을 했는데,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참회해야 한다.
지방에 있으면 몸소 가거나 제자를 보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만약 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면전에서 용서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경우 그 승원에 사는 수행승에게 쪼그리고 앉아서 “존자들이여, 저는 이러이러한 이름의 존자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 그 존자가 저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Vism.13.85)라며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묘지로 가서 참회를
청정도론에 따르면 참회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 법당에서 참회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상대방을 찾아 가는 것이다. 찾아 가서 원한이나 적개심, 응어리를 풀어주는 것이다. 마치 미결계산서를 해결하는 것과 같다.
결재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 쳐다보지 않게 된다. 깨끗이 잊어버린다. 업으로서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미결인 채로 남아 있으면 둘 다 업을 짖게 된다. 채무자의 업이 채권자에게도 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수행자라면 깨끗이 잊어 버릴 수 있으나 일반사람들은 끝까지 가슴에 남아 있다.
가슴에 남아 있는 업은 누구도 제거할 수 없다. 결재가 이루어진다면 그제서야 응어리가 풀릴 것이다. 더 이상 업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미결인채로 계속 남아 있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업을 짓게 만든다.
내 돈 떼 먹고 달아난 사람을 생각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악한 생각을 하여 악업을 짓게 만든다. 이런 과보는 매우 큰 것이다. 분노의 감정이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줄지 모른다.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악업은 털어 버리고 가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상대방을 직접 대면해서 무릎 꿇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사망하여 이 세상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 난감할 것이다. 이런 경우 청정도론에서는 “만약 그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면 완전한 열반에 든 침상에 가거나, 묘지로 가서 참회를 구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생천의 장애나 길의 장애가 없게 되고 치유된다.”(Vism.13.88)라고 했다.
백번, 천번 참회하는 것 보다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업을 지었다. 그것은 신체적인 악업, 언어적인 악업, 폭력작인 악업이다.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사고 눈물을 나게 만들었다면 악업을 지은 것이다. 설령 모르고 지은 악업이라고 하더라도 악업은 악업이다. 나는 잊어 버렸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에게 원한으로 원망으로 남아 있다면 나의 삶은 평안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생천의 장애나 길의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수행자로 삶을 산다면 악업은 털고 가야 한다. 법당에서 백번, 천번 참회하는 것 보다는 한번 만나서 무릎 꿇는 것만 못하다. 그가 죽었다면 무덤이라도 찾아가서 무릎 꿇어야 한다고 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함을 말한다. 저지른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다. 원한 맺힌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평생 가게 된다. 평생 그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듣는 어떤 식으로든지 나의 삶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털어낼 것은 빨리 털고 가야 한다. 그것도 하루 빨리 털고 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백번, 천번 참회하는 것보다 한번 찾아가서 무릎 꿇는 것이 더 낫다.
2020-08-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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