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그 사람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 겉으로 보아서는 믿음직하다. 객관적 자료를 보면 신뢰를 주기에 충분하다. 마치 기계장치의 제원을 보는 것처럼 스펙이 화려하다. 더구나 인물도 훤칠하다. 과거 경력을 보니 여러모로 믿을 만하다. 그런 그가 실망스러울 때가 있다. 그에 대한 환상이 깨졌을 때 실망을 넘어 배신감을 느낀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함부로 믿는 경향이 있다. 겉보기로만 판단하는 것이다. 내면을 모르기 때문에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낀다. 심지어 사기도 당한다. 나 보다 우월해 보일 때 사기 당하기 쉽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쉽게 믿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많이 가진 자, 많이 배운 자, 지위가 높은 자를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부자이면 남다르게 뛰어난 점이 있기 때문에 부를 이룬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돈 많은 사람 앞에서는 일단 꿈뻑 죽는 것이다. 많이 배운자, 즉 학력이 높은 자는 인격도 고매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체로 많이 배운 자들은 일반사람들과 달리 품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겪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지위가 높은 자는 능력있는 자로 보기 쉽다. 그 자리에 오르기 까지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지는 겪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가진자, 배운자, 고위자는 모두 능력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부러워 한다. 또한 인품과 인격도 훌륭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겪어 보아야 알 수 있다. 경계에 부딪쳐 보아야 알 수 있다. 막연한 환상을 가졌을 때 실망하기 쉽다. 왜 그런가? 범부중생이기 때문이다. 욕계 범부중생을 말한다. 탐, 진, 치로 사는 범부중생이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범부가 범부를 믿었을 때 실망하기 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출가수행자는 괜찮을까? 역시 스님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스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 아함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그는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갔으니, 나는 이제 그 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네 번째 허물이라고 하느니라.” (과환경(過患經), 잡아함경 제30권 제837경)
경에서는 스님을 믿지 말라고 했다. 스님을 부처님처럼 믿고 따랐는데 어느 날 계행을 보고 실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환속해 버린다면 그 실망감은 얼마나 클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불법이 약화되는 요인이라고 했다. 스님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을 믿지 말라고 했다.
사람을 믿어서도 안되고 스님을 믿어서도 안된다. 그럼 누굴 믿어야 할까? 불교인이라면 당연히 삼보를 믿어야 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를 믿어야 한다. 믿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귀의처로 하고 피난처로 해야 한다. 세 가지는 모두 부처님과 관련된 것이다. 결국 믿을 것은 부처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
부처님은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함부로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과 같다. 함부로 스님을 믿지 말라는 말과 같다. 믿을 것은 자기자신과 부처님뿐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자신을 섬으로 한다는 것은 자신을 의지처로 한다는 말과 같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은 나의 안전을 책임져 준다. 그래서 안전한 가르침을 섬으로 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없다. 스님도 믿을 수 없다. 설령 사향사과의 성자라도 의지해서는 안된다.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아라한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라한이 속한 승가공동체에는 의지하라고 했다. 왜 그런가?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서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한다. 불교인들은 이와 같은 승가공동체를 승보로 보아 의지처로 삼는다. 이는 스님을 의지처로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스님을 의지처로 하면 실망하기 쉽고 또한 불법 약화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으라고 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그가 제아무리 많이 가졌고,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다고 해도 함부로 믿으면 안된다. 탐, 진, 치로 살아 가는 범부중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님에게도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믿을 것은 자신과 가르침 뿐이다. 부처님은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2021-01-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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