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1263

업(業)의 가르침도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업(業)의 가르침도 진리가 될 수 있을까? 파스칼의 내기가 있다.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는 기독교적 변증법을 말한다. 이는 신론에 대한 것이다. 신의 유무에 대한 논쟁에서 신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말한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반반의 확률이라면 그래도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말이다. 파스칼의 내기는 죽었을 때 적용된다. 평소 신이 없다고 믿었던 사람이 죽었을 때 신이 있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이럴 경우 차라리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반반의 확률에서 이득이 됨을 말한다. 반반의 확률이라면 불교에도 파스칼의 내기와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을 말한다. 시기적으로 불교가 먼저 성립되었기 때문에 원조라고 ..

담마의 거울 2020.08.20

어둠에서 빛으로, 불교는 빛의 종교

어둠에서 빛으로, 불교는 빛의 종교  역사적으로 큰 사건에 대하여 경천동지한다고 말한다.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드는 사건은 어떤 것일까?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하는 사건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에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 불교에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 있다. 니까야를 보면 일만세계가 진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모두 부처님과 관련된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은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맛지마니까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아난다여, 보살이 모태에서 태어났을 때에, 신들의 세계에, 악마들의 세계에, 하느님들의 세계에,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에,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

담마의 거울 2020.08.17

갈 길 먼 나그네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갈 길 먼 나그네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오랜만에 학의천을 걸었다. 그 동안 늘 승용차를 이용하여 일터로 왕래했으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되어서 걷기로 했다. 학의천도 폭우로 인한 상처가 있다. 늘 건너 다니는 무지개다리까지 범람하면 큰 비가 온 것이다. 마치 연례행사차럼 일년에 한번은 이런 일이 일어난다. 도보길과 자전거길까지 범람해서일까 육중한 석재의자가 밀려 나 있다. 그리고 갈대는 모두 쓰러져 있다. 폭우가 할퀴고 간 처참한 모습이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 굴다리를 지나면 일터가 나온다. 약 20여분 되는 거리를 알아차림 하며 걷는다. 한발한발 천천히 걷는 것이다. 뛰어다니거나 급작스럽게 방향을 바꾸는 일은 없다. “왼발, 오른발” 하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잡념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틈새를 비집고..

담마의 거울 2020.08.14

출가의 삶도 어렵고 재가의 삶도 어렵다

출가의 삶도 어렵고 재가의 삶도 어렵다 세상에 두 가지 삶이 있다. 재가의 삶이 있고 출가의 삶이 있다. 재가의 삶도 힘들고 출가의 삶도 힘들다. 재가의 삶은 왜 어려울까? 이는 “세상의 삶은 어렵다. 재가의 삶은 고통스럽다.”(Dhp.302)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재가의 삶은 어려운 것을 넘어서서 고통스런 삶이라고 했다. 재가자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생활하려면 직장에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하와의 관계를 원만히 해야 한다. 인간적인 갈등이 있으면 매우 고통스런 것이다. 가정에서는 부부관계, 부모자식과의 관계를 원만히 해야 한다. 이러한 재가의 삶에 대하여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거나 커다란 바다를 물로 채우듯, 어렵다.”(DhpA.III.462)라고 ..

담마의 거울 2020.08.11

담마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담마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점심시간이 되면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먹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이 식당 저 식당 기웃거리며 그날 컨디션에 맞는 메뉴를 골라 먹는다. 탁월한 선택이 되었을 때 만족한다. 다음 배고플 때까지 잊어버린다. 세상에 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을 투자해서 근사한 식탁을 차려 놓는다. 혼자 먹기가 아쉬워서일까 인터넷에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보는 사람은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눈으로만 먹을 뿐이다. 최상의 맛이 있는데 맛은 먹는 것에만 있지 않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고 나면 포만감에 쳐다보지 않는다. 배고플 때까지는 아무리 맛난 음식도 한계가 있다. 맛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담마의 거울 2020.08.07

글만 쓴다고 타박하는데

글만 쓴다고 타박하는데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하루 한건 쓰는 것이다. 또 틈만 나면 쓴다. 두 시간이 생겼을 때 “이거 글하나 나오는 시간인데.”라며 글을 쓴다. 쓰다 보면 세 시간, 네 시간 걸릴 때가 있다. 글 하나가 나오기까지 보통 네 시간가량 소요되는 것 같다. 주로 오전에 쓰기 때문에 오전일과를 글쓰기로 보내는 것이다. 요즘 글쓰기와 함께 수행도 겸하고 있다. 사무실 중간에 세 평가량 명상공간을 확보해 놓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걷거나 앉는다. 생업이 있고 글쓰기가 있기 때문에 오래 하지는 못한다. 잠시 짬을 내서 일이십분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그 짧은 시간이나마 집중했을 때 일하는데 도움을 준다. 집중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어제 법우님으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블로그에 종종 좋..

담마의 거울 2020.07.31

남을 감동케 한적이 있는가?

남을 감동케 한적이 있는가? “당신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남을 감동시켜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영화 버킷리트스트에서 들은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대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을 감동케 한 적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남의 가슴을 울리게 할 정도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로지 나자신과 가족만을 위해서 살았을 뿐 남을 위해서 살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직장생활 할 때 그랬다. 직장생활 20년 했지만 직장생활을 20년 했다. 더 이상 쓸모 없어서 버려질 때까지 이곳저곳 전전하며 붙어 있었던 것이다. 살기에 바쁘고 생존하기에 바빴기 때문에 옆도 뒤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남에게 도..

담마의 거울 2020.07.30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가르침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초기경전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전승과정에서 오류가 없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그 많은 경전을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가르침(Dhamma)에 크게 의존한다. 이는 법귀의에서 “담망 사라낭 갓차미”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말로는 “가르침에 귀의합니다.”가 된다. 여기서 사라나(saraṇa)는 영어로 ‘protection; help; refuge; a shelter’의 뜻이 있다. 그래서 법귀의는 법에 귀의의 뜻도 의존의 뜻도 있지만 피난처(refuge)의 뜻도 있다. 불교인들은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을뿐만 아니라 부처님과 상가에 대해서도 피난처로 삼는다. 이렇게 삼보..

담마의 거울 2020.07.05

어떻게 해야 스승을 잘 선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스승을 잘 선택할 수 있을까? 스승도 선택할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선생을 선택할 권한이 없다. 짜여진 시간표대로 들어야 한다. 나의 성적을 위해서는 실력 있는 선생의 강의를 들어야 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 스승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대학에서는 듣고 싶은 과목을 들을 수 있고 듣고 싶은 교수에게 들을 수 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전공필수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만약 그가 더 공부를 하기를 더 원한다면 스승을 찾아 나설 것이다. 국내에 없다면 외국에 유학 갈 것이다. 이런 경우 스승을 선택해야 한다. 제자에게 있어서 스승은 선택의 대상이 된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을 보면 선재동자는 스승을 찾아 나..

담마의 거울 2020.07.02

비가 와서 좋은 날

비가 와서 좋은 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장마철 새벽에 떠오른 말이다. 예경지송 추모경송품에도 실려있는 시수념(死隨念)에 대한 문구이다. 삶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해진 수명이 없음을 말한다. 백세시대를 말하지만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죽을 조짐도 없다. 언제 죽을 것이라고 알려 주지 않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서가 있다. 우다나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그때 한 수행승이 세존께서 계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몸을 바로 세우고 예전의 업이 성숙하여 생겨난 괴롭고 찌르고 아리고 쓰라린 고통을 참으면서 새김을 확립하고 일아차리며 고뇌를 여의고 앉아 있었다.”(Ud...

담마의 거울 2020.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