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먹기 위하여 사는가? 효소단식을 해 보았더니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24. 12:37

 

먹기 위하여 사는가? 효소단식을 해 보았더니

 

 

 

신조어가 생겨 났는데

 

국민단식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유민아빠가 40일 동안 단식하다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자 동조단식자가 무려 2만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이는 광화문광장 뿐만 아니라 집이나 직장, 학교 등 각지에서 지지하는 단식을 말한다. 신청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홈페이지(http://sewolho416.org/2323)’이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인증샷을 찍어 보내기도 한다.

 

 

  

유민아빠와 함께 동조단식

 

 

 

입맛 다시는 시대

 

온갖 욕망을 자극하는 시대이다. TV를 보면 어느 채널에서는 먹거리프로로 넘쳐 난다. 단지 눈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먹는 모습을 보면 군침이 돌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러나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보기만 할 뿐 냄새도 맡을 수 없고, 혀로 맛 볼 수도 없고, 목으로 넘길 수도 없다. 다만 남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 볼 뿐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가 모두 TV앞에서 그림의 떡을 열심히 감상하면서 입맛 다시는 시대이디.

 

배불러 죽겠다

 

사람들은 단 하루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다. 하루 세 끼는 반드시 챙겨 먹어야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끼만 굶어도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다. 과식을 하여 배불러 죽겠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화제를 먹는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불교방송에서 내가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난 다음에 소화제를 먹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였다. 배가 터질 때 까지 꾸역꾸역 집어 넣다가 배불러 죽을 것 같자 이번에는 소화제를 투여 하여 소화가 잘 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리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먹기 위해서 사는가?

 

사람들은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TV에서는 매일 어느 채널에서나 먹거리가 방송되고 있고, 거리에는 식당으로 넘쳐 난다. 인터넷에서도 맛집과 관련된 포스팅으로 넘쳐난다. 이처럼 먹기 위하여 사는 세상에서 단식이라는 말은 매우 생소하다. 먹는 맛에 이 세상을 살아 가는데 단식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곡기를 끊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정치적 목적일 수도 있고 자신의 건강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효소단식을 하였는데

 

단식을 한 적이 있다. 지난 2002도의 일이다. 그 때 당시 단식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에 들어가 1주일간 단식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다. 효소단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500ml정도 되는 패트병에 효소액을 나누어 주는데 그것이 하루 동안 지탱할 유일한 음식이었다.

 

단식 3일 째가 되자 명현현상이

 

단식을 할 때 처음 3일간이 고비 이었다. 단식 3일 째가 되자 이른바 명현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명현현상은 단식을 하면 나타나는 현상으로 누구나 한번쯤 겪는다. 그런 명현현상은 구강염, 두통, 나른함, 졸림, 윗몸출혈, 항문가려움증, 발진, 발렬, 두두러기, 요통, 혈변, 설사, 손발저림, 감기증상, 기침 ,콪물, 코피, 하혈, 각혈,목건조, 목가래, 무기력증, 빈혈, 현기증, 갑갑증, 눈충혈, 눈침침, 눈물, 방귀, 다리부움, 구토, 혓바늘, 흉통, 짜증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곡기를 끊음으로 인하여 숨겨져 있던 현상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병의 치유과정으로 본다. 단식을 하는 주된 이유가 살빼는 것이라 하지만 치유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3일째 되는 날 상태가 최악이었다. 한번도 하루 이상 굶어 보지 않았는데 무려 3일간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므로 허전 하였다. 마치 대장에 있는 노폐물이 다 씻겨 갔는지 똥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 세 끼 식사한 버릇이 있어서 주어진 효소액을 하루 세 번 나누어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늘 배가 고팠다. 그런 상태에서 3일째가 지나자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도저히 걸을 수 없어서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불과 한 시간 정도 지나자 회복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명현현상이 지나가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 왔다. 다만 밥만 먹지 않을 뿐 활동하는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3일을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는다?

 

단식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옛말에 “3일을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는다라는 말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3일을 굶어 보니 약간의 명현현상만을 체험 하였을 뿐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한끼만 굶어도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고 하는데 3일간 굶었어도 멀쩡 하였기 때문이다.

 

효소단식을 1주일 하였다. 그 일주일 기간동안 방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단식원의 프로그램에 따라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조도 하고, 명상수행도 하고, 등산도 하는 등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잠들기 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을 하는데 밥을 먹지 않고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였다는 사실이다. 외부에서 영양분을 공급해 주지 않아도 몸이 유지한 것이다.

 

단식 3일 째 이후에는 배고프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그동안 습기가 있어서 끼니때가 되면 배고픔을 약간 느끼지만 하루 이틀 지남에 따라 먹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음식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 하루에 한끼라도 안먹으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였으나 단식을 하고 나서부터는 먹는 것에 대한 집착, 즉 식탐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아등바등 먹으려고 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고 남의 집 담을 넘는다는 말을 수긍하기 어렵다.

 

자신의 몸을 태워서

 

그렇다면 단식을 하였을 때 어떻게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단식을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실 밥을 먹지 않고도 일주일 이상 지나도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평소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몸을 태워 유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운다라고 한 것은 자신의 몸을 영양소로 활용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몸은 외부에서 영양소를 공급해야만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곡기를 끊어 버리면 영양소가 차단되기 때문에 그 때는 자신의 몸을 영양소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뚱뚱한 사람은 버틸 수 있는 좋은 영양소가 된다. 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살을 영양공급원으로 하여 몸이 버텨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단식을 하면 살이 빠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몸을 태워서 버텨 나가기 때문이다.

 

단식을 하면 살빼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그래서 다이어트 등으로 살빼기를 하는 것 보다 단식을 통하여 살을 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식원에서도 주로 살빼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살빼는 것만 단식의 목적이 아니다.

 

병의 치유목적으로

 

살빼기와 더불어 단식을 하는 주요한 목적중의 하나는 치유이다. 단식을 함으로 인하여 몸속의 노폐물을 태워 없애 버리기 때문에 단식하는 것에 대하여 병의 치유로 활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단식원에 들어 온 사람들 중의 일부는 병의 치유 목적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단식을 하게 된 동기는

 

단식을 하게 된 동기는 기분전환을 위해서이다. 남들처럼 살을 빼기 위한다거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단지 생활태도를 바꾸어 보기 위하여 단식을 하였다. 무언가 변화를 도모하고자 한 것인데 그때 당시 유행하던 단식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제까지 삶의 방식을 바꾸어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일만 할 줄 알았고, 직장이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 등 자신의 삶의 아닌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한 삶의 방식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그런 돌파구로서 생각한 것이 단식이다. 일종의 도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언가 해결책이 있겠지 하며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큰비용을 들여 단식원에 등록하였다. 경남밀양에 깊은 산중에 있는 단식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단학선원계통이었다. 그래서 기체조나 명상수련등을 접하였는데 이런 수련방법은 처음이었다. 전국에서 온 4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1주일을 생활한 것이다.

 

단식원에서 1주일간 생활은 삶의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직장과 집을 마치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보낸 지난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직장이 있어야만 안심이 되고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야만 의무를 다하는 듯한 삶의 방식에서 이런 삶의 방식도 있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음식에 대한 갈애가 사라졌다

 

단식을 하면서 가장 먼저 변화 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먹는 것이다. 이제까지 끼니는 굶지 말아야 하며 가급적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기름진 고기를 먹어야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주일 단식을 하면서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

 

몇 일 굶어 보니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 한끼 안먹어도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이고, 하루 먹지 않는다고 하여 큰일 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3일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는데 낭설임을 알았다. 3일 굶어도 정상생활이 가능한 것은 몸속에 축적된 영양분으로 버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치 곰이 겨울잠을 자기 전에 피하조직에 지방을 축적해 놓은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먹지 않고 몇 일을 살다 보니 음식에 대한 갈애가 사라졌다. 특히 기름진 고기를 먹는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단식이 끝난 후에 한동안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 대신 채식위주로 식사를 하였다. 이렇게 고기를 삼가고 채식위주로 먹다 보니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번 굶어 보니

 

기분전환을 시작한 단식이었지만 의외로 얻은 것이 많았다. 단식원에 상당한 금액의 비용을 지불하였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돈을 주고 맛있는 것을 사먹는 것 대신에 돈을 주고 오히려 굶는 것을 자처 한 것이긴 하지만 얻는 것이 더 많았다. 그것은 삶의 태도와 방식의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태어나서 이제까지 굶으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한번 굶어 봄으로 인하여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전과 이후의 생활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단식을 하고 나서 2년 후인 2004년 불교와의 인연을 맺으면서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2002년의 1주일간의 단식은 삶의 방식을 변화하기 위한 예비단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초심으로

 

단식을 한 이후 음식에 대한 갈애가 사라졌다. 고기 먹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몇 달 지나자 바쁜 일상에서 없었던 일로 되어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때 당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초심을 이야기 하는지 모른다. 과식을 하여 배탈이 나고, 과음을 하여 고통을 받을 때 단식 하던 때를 생각하면 몸과 마음이 심각하게 오염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을 완전하게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먹을까 먹기 위해서 살까?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하면 매우 건전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먹기 위하여 산다면 본말이 전도 된 것과 같아서 마치 짐승보다 못한 삶의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부분 사람들은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당장 TV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먹거리프로그램으로 넘쳐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종 맛집이 소개 되고 있는 것 역시 먹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TV에서 먹거리프로를 보면 욕망을 부추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다. 식욕과 성욕을 생리적 욕망이라 하고 또 근원적 욕망이라 한다. 그런데 TV에서 먹거리프로를 밥먹듯이 방영하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는 영상을 자주 보여 주었을 때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TV뿐만 아니라 인터넷도 마차가지이고,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식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식욕이 만족되면 성욕이 일어나고, 이어서 수면욕, 재물욕, 명예욕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먹는 것에 대한 갈애야말로 모든 욕망의 근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탐진치의 소멸을 목표로 하는 불교에서 먹는 것에 대한 갈애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중의 하나가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음식절제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하는데 부처님이 강조한 사항이다. 숫따니빠따에서도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선한 친구와 사귀어라. 인적이 없이 외딴 곳, 고요한 곳에서 거처하여라.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stn338)”라고 말씀 하셨다. 음식의 분량을 안다는 것을 음식절제를 하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음식을 절제해야 할까? 때아닌 때에 먹지 않는 것이다. 오후불식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하루 한끼의 식사만 한 것이다.

 

오후불식이라 하여 한끼만 먹는다고 하였을 때 양껏 배불리먹어도 되는 것일까?초기경전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음식절제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Ūnudaro mitāhāro

apapiccassa alolupo,
Sace icchoya nicch
āto

aniccho hoti nibbuto.

 

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탐욕을 일으키지 마십시요.

욕망이 없어지고 버려져서,  

욕망이 여윈 것이 적멸입니다.(stn707)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Sn3.11)’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부처님은 음식절제(mitāhāro)’를 이야기 하면서 배를 가득 채우지 말라(Ūnudaro)’고 하였다. 여기서 음식절제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mitāhāro’이다. Mitāhāro‘Mitā(balanced )+ahāro(Food)’ 의 의미로서 음식의 적당량을 아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배를 덜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배를 가득 채우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Ūnudaro’이다. ŪnudaroŪn(to lessen) +udara(stomach)’의 뜻이다, ‘위를 작게 만들다는 뜻으로 배를 채우지 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배불리 양껏 먹지 말라는 것이다.

 

배불리 양껏 먹는 수행자는

 

배불리 양껏 먹는 자는 수행자가 아니다. 하루 세 끼를 찾아 먹고 그것도 모자라 간식을 한다면 그를 수행자라 볼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하여 살이 찐 수행자를 수행자로 볼 수 있을까?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음식의 때와 양을 모르는 수행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Subhānupassi viharanta        수바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asavuta,            인드리예수 아상위땅
Bhojanamhi amattaññu
,           보자남히 아맛따늉

kusīta hīnavīriya,            꾸시땅 히나위리양
Ta
ve pasahati Māro             땅 웨 빠사하띠 마로

vāto rukkha va dubbala.       와또 룩캉와 둡발랑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dhp7)

 

 

아름다움에 탐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눈, , , , 감촉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수호하지 못함을 말한다. 이는 배불리 양껏 먹는 것에서 시작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먹는 것이야말로 오관이 총 동원 되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실 때

 

흔히 와인을 마실 때 몇 가지 지켜야 될 사항이 있다. TV 등에서 볼 수 있는 와인강좌에 따르면 값비싼 와인을 소주 마시듯이 훌쩍 마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한다.

 

와인을 마실 때 먼저 눈으로 와인을 감상하고 이어서 와인 따르는 소리를 듣는다. 와인을 입에 넣기 전에는 와인의 향기를 코로 맡는다. 입에 넣은 다음에는 혀로 말아 입속 주변에 자극을 주라고 말한다. 이렇게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즐긴다음에 마침내 목구멍으로 넘긴다.

 

목구멍으로 넘어 가는 순간 와인 특유의 맛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와인 하나 마시는데 있어서 오관이 총동원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와인만 오관과 오감이 총동원 되는 것일까?

 

오관과 오감이 총 동원 되었을 때

 

음식(飮食)이라 하면 사람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시는 것과 먹는 것은 모두 음식범주에 포함된다. 와인도 역시 음식이다. 그런데 와인을 마실 때 오관이 총동원 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먹는 것 역시 오관이 총동원 된다. 예를 들어 고기를 먹을 때 눈, , , , 감촉이 총동원 된다. 고기를 보고, 고기 굽는 소리를 듣고, 고기 냄새를 맡고, 고기를 혓속에서 맛을 보고, 마침내 고기를 목구멍을 넘겼을 때 감촉을 느낀다. 이렇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오관과 오감이 총동원 된다.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강조 하였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는 음식을 절제하라(mitāhāro)”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온다. 부처님이 왜 이토록 음식절제를 강조하였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욕망의 근원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감이 총동원된 욕망의 근원이다. 세상에서는 욕망을 추구하지만 그런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 불교이다. 그런데 배불리 양껏 먹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음식절제를 말씀 하신 것이다.

 

성적행위를 삼가는 것

 

음식절제와 함께 부처님이 강조 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성적행위를 삼가는 것이다. 특히 수행자에게서 그렇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청정한 삶(brahmacariya)’으로 설명된다.

 

출가하면 청정한 삶을 살아 가야 한다. 이는 최상의 삶을 말한다. 청정한 삶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내는 삶을 말한다. 보통사무량심이라 한다.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하여 범천의 삶이라는 뜻으로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 한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청정한 삶을 실현 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조건은 성적행위를 삼가는 것이다. 만일 성적행위를 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근본욕구이다. 이른 근본 욕구에 대하여 생리적 욕구라 한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 등이 생리적 욕구에 해당된다. 그런데 대부분 세상사람들은 이런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삶을 살아 간다. TV에서 먹거리 프로를 시도 때도 없이 방영하는 것도 사실은 인간의 근본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성욕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너도 나도 누구나 욕구를 만족하기 위하여 살아간다.

 

식욕과 성욕을 자극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오관을 자극한다는 말과 같다. 식욕과 성욕은 오관과 오감이 총동원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즐길거리를 늘 찾는다. 이곳 저곳에서 즐길거리를 찾다 보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즐길거리를 찾아 이곳 저곳 찾아 다니면 윤회하게 된다. 이는 욕망대로 사는 삶을 말한다. 오관으로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태어나고 죽는 일이 반복 되는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 바로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56.11)”라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환희 하는 삶은 다름 아닌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아 다니는 삶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 대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식욕과 성욕이다.

 

맛을 알고 나서부터

 

식욕과 성욕은 결국 맛에 대한 갈애이다. 맛을 알고 나서부터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맛에 대한 갈애가 일아나는 한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래서 맛에 대한 갈애는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는 갈애(tahā ponobhavikā)와 같은 것이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갈애는 미래의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 최선봉에 맛에 대한 갈애가 있다. 한번 맛을 알게 되면 그 맛을 못 잊어서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맛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바쎗타여, 그러자 어떤 뭇삶에게 ‘어참, 이것이야말로 무엇일까?’라고 동요가 생겨나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았다.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D27)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이다. 부처님은 우주생성의 원리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사성계급의 발생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부처님 당시 통용 되고 있었던 우주생성의 원리가 소개 되어 있다.

 

아간냐경(D27)에 따르면 인간이 맛을 알게 된 최초의 순간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우주가 생성 되기 이전에 어떤 존재는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하늘을 날아 다녔다. 그러나 공덕과 수명이 다하여 아래 세상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맛을 알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빛나던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 났을 때 맛 본 것은 땅조각이었다. 땅조각을 입에 대고 맛을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그 맛은 어떤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혀 끝에 놓인 것만으로 칠천 개의 미각신경이 퍼져나가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어 갈애가 생겨났다.(Smv.865)”라고 설명되어 있다. 칠천개의 미각신경을 자극한 것이다. 마치 단식 후에 맛을 음미하는 것 같다.

 

단식을 하고 나면 맛을 느낀다. 혀가 예민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소 한 잎사귀에서도 온갖 맛이 나온다. 이때 채소는 더 이상 풀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된다. 마찬가지로 한번 도 맛을 보지 못한 존재가 땅의 맛을 보았을 때 혀로 칠천가지 미각신경을 자극하였다는 것은 칠천가지 맛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번 맛을 알게 되자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난다. 그래서 오로지 맛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보고 있다. 어떻게 타락해 갔는가? 이에 대하여 맛을 알고부터, 생리적욕구와 수행자의 도둑질(2013-04-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맛을 알고부터 인간의 타락이

 

맛을 알고부터 인간의 타락이 시작 되었다. 그 타락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 아간냐경(D27)이다. 그럼에도 바이블의 창세기와 비교하여 허구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여럿은 모르는 것으로 스스로 무지를 폭로하는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간냐경은 사성계급의 발생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수행의 원리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경의 말미에 사성계급과 관계없이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라고 하였다.

 

어떻게 남녀가 생겨났는가?

 

그런데 우주와 세상의 발생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아간냐경에서 맛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사실이다. 맛을 알게 되면서 달과 태양이 출현하고, 쌀 등이 생겨났다고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남녀의 특징이 나타난 것도 맛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바쎗타여, 그 뭇삶들이 경작하지 않고도 여무는 쌀을 먹으면서 그것을 먹거리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아 오랜 세월을 보낼수록, 바쎗타여, 그럴수록 더욱 더 그들의 몸은 거칠게 되어 아름답고 추한 것을 드러냈고, 여자에게는 여자의 특징이 나타나고 남자에게는 남자의 특징이 나타났다.

 

(아간냐의 경-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기독교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주가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간냐경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주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공덕과 수명이 다한 천상의 존재가 아래 세상으로 떨어지면서 세상이 시작 된 것이다. 윤회하는 과정에서 세상이 발생된 것이다. 이는 우주의 성주괴공에 따른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겁화가 일어나 우주가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것으로 본다. 그런 겁화는 인간의 탐진치가 치성 하였을 때라 한다. 그래서 탐욕이 치성하면 색계초선천까지 우주가 파괴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 공겁의 상태가 1/4겁 유지되다가 수명과 공덕이 다한 존재가 죽어서 태어남에 따라 성겁이 시작된다. 아간냐경은 성겁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남녀가 생겨 나는 원리도 맛에 따른다. 땅조각으로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서 달과 태양이 생겨나고 쌀도 생겨 나게 되었는데, 쌀을 먹게 됨에 따라 남녀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남녀특징이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추해짐에 따라 발생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남녀한몸인 중성이었을 때는 매우 아름다운 존재이었음에 틀림 없다.

 

이렇게 남녀 구분이 발생되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경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지나치게 몰두 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지나치게 몰두 하면서 탐애가 생겨났고 몸이 달아 올랐다. 그들은 몸이 달아 올라 성적인 교섭을 행했다(D27)”라고 표현 되어 있다. 하지만 성적교섭은 비법이라 하였다. 그래서 짐승같이 본 것이다. 그래서 비법을 가리기 위하여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집이 생겨난 요인으로 비법은 성적교섭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음식절제를 강조한 이유

 

아간냐경에 따르면 이 세상의 발생원리는 맛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세상이 발생되었고 남녀가 생겨났고 성적교섭이 일아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근원은 맛에서부터 시작 된다. 한번 맛을 알게 되자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난 것이다. 부처님이 왜 음식절제를 강조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맛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 난 자들이 수행자이다. 반면 맛에 대한 갈애로 먹는 것에 집착하는 자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산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기 때문에 맛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은 단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먹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식사절제를 강조하며 때 아닌 때 먹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음식은 어떤 마음으로 먹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neva davāya na madāya na maṇḍanāya na vibhusanāya, yāvadeva imassa kāyassa hitiyā yāpanāya vihisūparatiyā brahmacariyānuggahāya, iti purāañca vedana paihakhāmi, navañca vedana na uppādessāmi, yātrā ca me bhavissati anavajjatā ca phāsuvihāro cā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먹는 것에 대하여 놀이나 사치로 먹지 말라고 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식도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수행자에게 해당되는 말이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부처님은 음식을 먹되 몸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먹으라고 하였다. 마치 기계에 기름을 쳐야 돌아 가듯이 몸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만 먹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음식절제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되고  청정한 삶을 사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태어남을 유발하는 식욕과 성욕

 

청정한 삶은 성적교섭을 삼가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와 함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음식절제이다. 왜 그럴까? 앞서 언급하였듯이 음식은 오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성적교섭 역시 오감을 자극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인 식욕과 성욕에 갈애하면 오감을 자극하여 집착하게 된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식욕과 성욕에 대한 갈애는 결국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 한 존재가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은 결국 식욕과 성욕에서 비롯된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그러나 식욕과 성욕을 삼가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청정한 삶을 사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렇다 특히 아라한의 삶이 그렇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음식절제를 하는 아라한의 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번뇌를 부수고

음식에 집착하지 않고

텅비고 인상을 여의어

활동영역에서 해탈한 님들,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들의 자취는 찾기 어렵다. (Dhp93)

 

 

법구경 거룩한 님의 품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여기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뜻한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더 이상 음식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집착 없는 것이 아라한의 삶이다. 그래서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들의 자취는 찾기 어렵다.”라 하였다. 행위를 하지만 존재를 유발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이 있을 수 없다.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사람들은 한끼만 안먹어도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맛을 찾아 이곳 저곳 기웃거린다. 심지어 배불리 양이상으로 먹고 나서 배불러 죽겠다라고 말하면서 소화제를 먹기도 한다. 조금 더 지나면 로마시대처럼 먹고 토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삶은 단지 먹기 위하여 사는 삶과 다름이 없다. 짐승도 이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수 없이 등장하는 말이 음식절제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살기 위해서 먹지 먹기 위해서 살지 말라는 말과 같다. 맛에 대한 갈애는 결국 오관과 오감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맛에 대한 갈애는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아간냐경에 따르면 땅의 맛을 알고 난 다음 부터라고 한다. 처음으로 맛 본 땅의 맛으로 인하여 칠천개의 미각신경을 자극하여 칠천가지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 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맛을 알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경에 따르면 기쁨을 먹고 지냈다고 하였다. 음식을 먹고 삶을 유지 한 것이 아니라 기쁨을 먹고 살아 간 것이다. 이처럼 기쁨을 먹고 살아 간 것에 대한 게송이 법구경에 있다.

 

 

,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Dhp200)

 

 

 

2014-08-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