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보다 법공양(dhamma-pūjā)을, 절벽위의 사성암을 보며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천장사 순례팀은 ‘사성암’으로 향하였다. 지리산 일대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를 찾아 떠나는 순례에서 네 번째에 해당된다. 그런데 사성암은 다른 사찰들과 달랐다. 그것은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 꼭대기 험준한 곳에 있어서 별도의 ‘셔틀버스’를 활용하지 않으면 올라 갈 수 없다.
셔틀버스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길게 줄을 서 있어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였다. 불과 5분에서 10분 사이에 부지런히 실어 나르지만 한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가 올 때 까지 최장 30여분을 대기 해야 한다.
사찰순례 다니면서 기다린 적이 별로 없다. 언제 어느 때고 곧바로 들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곳 사성암은 길게 줄을 서야 하고 더구나 매표소에 표를 끊어야 한다.
셔틀버스 타는데 왕복 3000원이다. 이 금액은 절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한다. 절에 걸어 올라 갈 수도 있지만 올라가기에는 너무 멀고 가파르다. 물론 마음 먹고 올라 가면 한시간 이내에 충분히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승용차를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이래 저래 셔틀버스를 탈 수밖에 없다.
관광지 같은 사성암
셔틀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당도 하였다. 셔틀버스가 수시로 다녀서일까 인파로 북적인다. 관광버스 주차장도 있어서 전세버스로 온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사성암은 관광지 같은 느낌이 든다. 전국각지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다. 아마 대부분 불자일 것으로 본다.
사성암을 모두 보지 못하였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대기 하느라 시간을 많이 보낸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래서 도착 해서는 건성건성 외관만 보았다.
사성암은 사실상 유명 관광지나 다름 없다. 전국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대부분 불자일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런 이유로 곳곳에 기도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트모양의 노랑종이에
정상으로 올라 가는 길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았더니 종이에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다. 하트모양의 노랑종이에 각자 소원을 적어 줄에 꿰어 놓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소원을 빌고 있을까? 자세히 들여다 보니 건강, 학업, 사업, 취업, 장수 등 매우 다양하다. 이른바 불자들의 사대소원이 모두 포함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개 또는 네 개의 부처님 두상이
사성암은 기도처이자 관광지로서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 절벽에 아슬아슬 걸쳐 있는 전각이 있는가 하면 굴속 길이 나온다. 그리고 상상을 자극하는 천연조각품도 보인다. 보는 사람에 따라 또는 방향에 따라 세 개 또는 네 개의 부처님의 두상이 보이는 바위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기도처
사람들로 혼잡한 전각에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다만 절벽과 같은 천연자원을 활용하여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기도처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와 같은 외적 장엄물을 보고서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리고 깍아 지를 듯한 절벽에 세워진 기도처에서 소원을 빈다.
유명 기도처는 왜 막다른 곳에 있을까?
유명 기도처는 왜 절벽에 있을까? 관악산 연주대도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위태롭게 걸쳐 있다. 그곳에서 기도하면 기도발이 잘 먹힌다고 한다. 특히 학업과 관련된 기도발이 잘 먹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기도처는 절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굴도 절벽 못지 않은 좋은 기도처이다. 강화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 굴법당이 유명하다. 해안가에도 기도처가 있다. 그것도 절벽 위에 있는 기도처이다. 절벽과 해안이 맞닿아 있는 곳에 있는 기도처로서 연화도에 있는 연화사를 들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유명기도처는 절벽, 동굴, 해안가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절벽은 막다른 곳이다. 절벽에 서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 없다. 여기 동굴이 있다. 동굴 속에 들어 갔을 때 벽으로 막혀 있어서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다. 또 여기 해안가가 있다. 그것도 절벽아래에 있는 해안가이다.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다.
여기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내 몰린 자가 있다. 부도가 나서 더 이상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하늘로 솟을 수도 없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다. 문제라고 여겨졌던 것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풀리지만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문제, 자신의 능력 밖의 문제에 부딪친 자가 있다. 앞으로 나아 갈수도 뒤로 갈 수도 없다.
막다른 곳에 몰린 자가 있다. 마치 절벽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깜깜한 동굴 속에서 벽이 막혀 있는 것 같다. 해안가에서 바다를 마주 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이 인생의 거센 폭류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막장에 내몰린 자에게 희망이 없다. 절벽위에 서 있는 자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유명기도처는 절벽이나 동굴이나 해안에 있다.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있는 자들에게 한가닥 희망을 주는 곳이 기도처이다. 그런 기도처는 평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곳 절벽, 동굴, 해안가에 있다. 사성암에서 보는 절벽 기도처도 그 중에 하나 일 것이다.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데
사성암기도처에서 인상적 문구를 하나 보았다. 사성암 약사여래 기도공덕이라 하여 “약사여래불 기도를 하면 마음의 고통이 없어지고, 모든 재앙이 물러간다고 하여 약사기도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원을 세워 사성암 약사여래 부처님께 기도하면 병든 사람, 생활이 어려운 사람 등 누구나 그 업장이 소멸하여, 마음이 편안해지고 건강이 회복되어 뜻한 바가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역사여래 기도처인 것으로 보아 병든자에게 기도발이 잘 먹히는 곳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 마음을 사로 잡는 문구가 보인다. 그것은 “한가지 소원이 꼭 이루어지는 약사여래 기도도량”이라 하였다.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꼭 들어 준다는 말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다. 누구든지 이 말을 듣고 한가지 소원을 간절하게 빌지 모른다.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니 굳게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소원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좀더 시간이 걸리는 것일 수도 있다. 기도를 한 행위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원은 성취 될 것이다. 이 생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생이 될 수 있고, 더 건너 뛰어서 먼 후생이 될 수 있다. 발원을 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 있다.
유신론적이고 타력적 기도
한국불자들은 ‘기도’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곳 사성암에서도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약사여래불 기도를 하면”이라는 말로 시작 된다. 이런 현상은 전국적이라 볼 수 있다. 관음재일을 관음기도라 지장재일을 지장기도라 한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이 불자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이다. 과연 불교에서 기도라는 말은 타당할까?
기도라 하였을 때 유일신교를 연상케 한다. 유일신교에서는 기도라는 말이 일상화 되어 있다. 목사가 예배할 때 “우리 다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한다. 고등고등 다닐 때 미션스쿨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기도와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불가에서도 기도한다고 한다.
기도라는 말은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이다.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에게 문제를 해결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바라는 것이 기도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 유일신교에서나 사용되는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혹시 유일신교 따라하기 하는 것은 아닐까?
불공(佛供)이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한국불교에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기도라는 말 대신 좋은 말이 있다. 그것은 ‘불공(佛供)’이다. 이에 대하여 ‘기도(祈禱)인가 불공(佛供)인가, 진정한 공양의 의미는(2010-05-0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불공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말이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불공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기도라는 말이 대유행 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기도라는 말이 한국불교에 정착한 듯 하다.
불공이라는 말은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공양이라는 말은 부처님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법공양도 있고 재공양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일반적인 말인 ‘공양’이다.
공양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첫째, 불(佛)·법(法)·승(僧)의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이란 뜻이다. 셋째, 봉사함을 말한다. 넷째,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등을 말한다.”라 하였다. 이것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양의 의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기도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에서의 공양개념은 이와 약간 다르다.
뿌자(puja)란 무엇인가?
공양이라는 말을 빠알리어로 ‘뿌자(pūjā)’라 한다. 뿌자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보면 ‘(1) honour, respect, homage, (2) worship, devotional observances, devotional offerings; also offerings to monks.’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존경, 귀의, 예배의 뜻이다. 그리고 재공(財供)의 의미가 있다. 또 수행승에게 사대필수품을 제공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 어디에도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뿌자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두 가지 경전을 들고 있다. 하나는 숫따니빠따 ‘망갈라경(Sn2.4)’과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 실려 있는 문구이다.
뿌자에 대하여 망갈라경에서는 “pūjā ca pūjanīyānaṃ”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pūjanīyānaṃ 는 ‘entitled to homage; venerable.’의 뜻이다. 따라서 뿌자의 의미는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스님이 될 수도 있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가 될 수 있다. 결국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뿌자의 큰 의미라 볼 수 있다.
최상의 공양(paramāya pūjāya)이란
또 하나 뿌자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있다. 그것은 대반열반경이라 불리우는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유훈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The Buddha did not think much of mere outer worship. "Not thus, Ānanda, is the Tathāgata respected, venerated, esteemed, worshipped and honoured in the highest degree. But, Ānanda, whatsoever bhikkhu or bhikkhuni, lay man or lay woman, abides by the Teaching, lives uprightly in the Teaching, walks in the way of the Teaching, it is by him that the Tathāgata is respected, venerated, esteemed, worshipped and honoured in the highest degree" (D. 16).
(Pūjā, PCED194)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는 마하빠리닙바나경의 한 절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는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D16, 전재성님역) 라고 번역된다.
부처님은 ‘최상의 공양(paramāya pūjāya)’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최상의 공양이란 개인적 소원, 즉 개인이나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 치유 이른바 사대소원을 비는 기도가 아니다. 최상의 공양은 다름아닌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이라 하였다. 이것이 뿌자의 진정한 의미 일 것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불자들은 절에 가면 법당에 가서 참배 한다. 이 전각 저 전각 찾아 다니며 삼배를 하며 불전함에 돈을 넣고 소원을 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과 가족을 위한 건강, 학업, 사업, 치유 등 사대소원에 대한 것이다. 이런 기도는 유일신교에서 기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유일신교에서 사용하는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절에서 하는 기도는 유일신교에서처럼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으로 되어 버렸다. 과연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일까?
부처님이 원음이 널리 퍼지고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정보통신시대에 살고 있다. 더구나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글로벌화 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신론적이고 타력적 기도라는 말은 한국불교에서 이제 ‘폐기’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기도 라는 말 대신 본래 사용되었던 ‘불공’이라는 말로 되돌아 와야 한다. 그래서 관음기도라는 말 대신 관음법회 또는 관음불공이라 해야 한다.
불공이라는 말은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 말이다. 그런 공양은 불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재공(財供)도 있고 법공(法供)도 있다. 모두 공양이라는 말을 근간이라 한다. 그런 공양을 빠알리어로 ‘뿌자’라 한다.
뿌자의 의미는 기도를 의미 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공양중의 공양, 최상의 뿌자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불자들이 기도라는 이름으로 사대소원을 비는 것과 천지차이로 다르다.
재공양(āmisa-pūjā) 보다 법공양(dhamma-pūjā)
불자들은 기도 대신 최상의 공양을 해야 한다. 그것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다. 더 수승한 것은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There are two kinds of worship: in a material way (āmisa-pūjā) and through (practice of) the Dhamma (dhamma-pūjā). The worship through (practice of) the Dhamma is the better of the two" (A. II)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적으로 공양하는 재공양(āmisa-pūjā) 보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법공양(dhamma-pūjā)이 더 수승한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최상의 공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파 하는 것이다.
2015-11-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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