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다수결의 원칙과 승가화합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정치행위 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정치가 있고 삶 속에 정치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조직이나 단체에서 정치가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선을 추구하는 정치
정치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양보와 타협이고, 또하나는 차선의 추구입니다.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양보와 타협입니다. 양보와 타협이라는 말에는 정치상대가 있음을 말합니다. 만일 일당독재라면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있어야 양보도 하고 타협도 합니다. 이 말은 여도 있고 야도 있음을 말합니다. 여와 야가 있다는 것은 상대방을 정치파트너로 존중해주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이 발생하였을 때 토론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양자의 주장이 팽팽할 때 다수결로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 이전에 타협하면 가장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편이 양보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순순히 양보하지 않습니다. 조건을 제시합니다. 양보와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양보와 타협이지 사실상 거래하거나 흥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는 최선이 아닌 차선을 추구합니다.
최선을 추구하는 종교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양보와 타협이고 그결과 차선을 추구 합니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더군다나 차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종교가 정치행위를 하여 양보와 타협을 하고 차선을 선택하였을 때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요? 아마 본질에서 어긋날 것입니다.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핵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Dhp11)
법구경 11번 게송을 보면 핵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빠알리어 사라(Sāra)를 번역한 것으로 영어로는 ‘essence’의 뜻 입니다. 본질이라는 뜻 입니다. 진리라 해도 무방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10가지 사견이 본질이 아닌 것이라 했습니다. 10가지 사견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보시도 없고
2) 제사도 없고
3) 헌공도 없고
4)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5) 이 세상도 없고
6) 저 세상도 없고
7) 어머니도 없고
8) 아버지도 없고
9) 화생하는 뭇삶도 없고
10)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올바로 실천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10가지 사견은 단멸론적 허무주의 입니다. 빗나간 견해를 말합니다. 사견이 있으면 정견이 있습니다. 정견은 10가지 사견과 반대되는 개념 입니다. 이것이 핵심이고 본질이고 진리 입니다. 핵심이 아닌 것에 대하여 또다른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10가지로 설명합니다.
1) 잘못된 견해
2) 잘못된 사유
3) 잘못된 언어
4) 잘못된 행위
5) 잘못된 생활
6) 잘못된 정진
7) 잘못된 새김
8) 잘못된 집중
9) 잘못된 지혜
10) 잘못된 해탈
팔정도 아닌 것과 지혜와 해탈이 아닌 것이 핵심이 아닌 것 입니다. 핵심은 10가지 정견을 말합니다. 팔정도와 올바른 지혜와 올바른 해탈이 10가지 정견입니다. 불교에서는 ‘보시도 있고’로 시작되는 10가지 정견과 ‘올바른 견해’로 시작 되는 10가지 정견이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10가지 정견은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정치를 하면
불교에서 정치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파트너를 인정하여 여와 야로 구성된 정치의 장에서 양보와 타협으로 인해 차선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회에서 정당정치 하듯이 나누어먹기가 되기 쉽습니다. 선거가 밀실야합으로 주고받기식이 되기 쉽습니다.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에 차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항상 최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종교에서 양보와 타협에 따른 정치행위를 하였을 때 진리는 변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핵심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담마 아닌 것을 담마라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정치행위를 하여 차선책을 선택했을 때 그릇된 행경을 거닐 수 있습니다. 결코 진리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스님들을 승보라 하면
법(Dhamma)과 율(Vinaya)은 목숨걸고 지켜야 합니다.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에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Yo v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D16) 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떻게 됐습니까? 담마 아닌 것이 활개 치고 있습니다. 율은 무너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특히 율이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율장을 보면 제1장 크나큰 다발에 후렴시가 있습니다. 그 중에 인상적인 게송이있습니다. “만약에 경전과 농사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율장대품 1장)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경장보다 율장입니다. 계율이 무너지면 교단이 존속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한국불교에는 승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님들은 있지만 승가가 없는 것 입니다. 자자와 포살을 하는 여법한 승가를 보기 힘듭니다. 스님이 될때 수백가지 항목의 구족계를 받지만 그때뿐 입니다. 한국불교에서 구족계는 스님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불교에서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고 계율이 무너진 것은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이 정치 하듯이 양보와 타협으로 차선책을 채택하다 보니 핵심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글삼귀의문에서처럼 스님들은 있지만 승가가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이라 한것은 핵심에서 어긋난 것 입니다. 마치 정치적 절충점을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스님들을 승가와 같은 개념이라고 강변하는 것이 좋은 예 입니다.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양보와 타협의 정치행위를 하면 차선을 추구하게 됩니다. 본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불교에 승가가 존속하지 않는 것도 양보와 타협, 그리고 차선책이라는 정치행위를 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승가에서 화합을 강조합니다. 대체 어떤 화합일까요?
승가화합이란?
율장을 보면 승가화합과 관련하여 물과 우유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원래 물과 우유는 잘 섞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대들은 서로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지내기를 바란다.” (율장대품 10장) 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물과 우유는 화합하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정치행위를 하는 것처럼 양보와 타협과 차선책을 추구 해야할까요?
앙굿따라니까야에 ‘승가화합의 경(A10.38)’이 있습니다. 경에서 우빨리가 “세존이시여, ‘참모임의 화합, 참모임의 화합’이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참모임의 화합입니까?”라며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우빨리여, 세상에 수행승들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 가르침인 것을 가르침인 것이라고 설하고,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 계율인 것을 계율인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은 것이라 설하고, 여래가 말하고 설한 것을 여래가 말고 설한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이라 설하고, 여래가 행한 것을 여래가 행한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규정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규정하지 않은 것이라 설하고, 여래가 규정한 것을 여래가 규정한 것이라고 설한다.” (A10.38)
부처님은 법과 율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법과 율이 가장 기본이 됨을 말합니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로 모인 승가에서 화합은 법과 율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비법에 대하여 비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승가화합이라 했습니다. 율이 아닌 것에 대하여 율이 아닌 것이라고 말해야 승가화합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승가화합은 양보하고 타협하여 차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과 율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최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법이 아닌 것을 법이 아니라고 밝히고, 율이 아닌 것을 율이 아니라고 밝히는 것이 승가화합이라 했습니다. 한마디로 최선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승가화합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다수결의 원칙이란?
승가화합은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승가에서는 최선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과 율은 정치의 흥정대상이 아닙니다. 정치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여 양보와 타협으로 차선책을 이끌어 내지만 종교에서는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최선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이 생겼을 때 갈마제도 역시 최선을 추구합니다.
율장에 ‘예부야시까(Yebhuyasikā)’라 하여 다수결의 원칙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사마가마 마을의 경(M104)’에 따르면 쟁사가 발생하였을 때 일곱가지 해결책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부야시까입니다. 참고로 쟁사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논쟁으로 인한 쟁사, 고발로 인한 쟁사, 범죄로 인한 쟁사, 절차로 인한 쟁사가 있습니다. 이런 쟁사가 발생했을 때 율장에 따라 여법하게 판결해야 합니다. 그 판결방법에 대한 것이 일곱 가지입니다. 판결해결책을 옮겨 보면 1)대면하게 함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 2)기억을 환기시킴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 3)과거의 착란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 4)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 5)대중의 의견을 따름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 6)상대방에게 잘못을 물음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 7)풀로 덮어둠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중에 다섯 번째 항목인 ‘대중의 의견을 따름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승단내에서 직선제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예부야시까라 하는데 한역에서는 ‘다인어(多人語)’라 했습니다. 전재성님은 ‘다수에 입각한 조정’이라 했습니다. 영어로는 예부야시까에 대하여 “according to the majority”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수결에 따른 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난다여, 대중의 의견을 따름으로써 쟁사를 그치게 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만약 그 수행승들이 주처에서 쟁사를 해결할 수 없으면, 그들은 보다 많은 대중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아난다여, 그러한 수행승들은 모두 화합하여 모여야 할 것이다. 함께 만나서 가르침에 따른 원칙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가르침에 따른 원칙을 적용하면 그에 따라 쟁사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난다여, 어떤 쟁사는 이와 같이 대중의 의견을 따름으로써 그쳐지게 된다.”(M104)
불광사 100인대중공사
이것이 경장과 율장에서 보여지는 다수결 원칙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수결 원칙이라 하여 법과 율에 어긋나는 것이 선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선거로 본사주지를 뽑는 경우는 단 한번의 갈마로 선택하는 백이갈마가 이에 해당되지만, 비법에 대한 쟁사가 생겼을 때는 세 번 갈마 해야 합니다. 이를 ‘백사갈마(ñatticatutthakamma)’라 합니다. 한번 제안한 뒤에 다시 세 번 “찬성하면 침묵하고 이견이 있으면 말하라.”라 합니다. 이는 갈마를 관리하는 자, 즉 ‘산가지표결의 관리인(salākāgāhāpaka:행주인)’의 권한으로 진행됩니다.
다수결의 원칙, 예부야시까를 하는 원칙은 무엇일까요? 법을 보호하기 위합니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이는 경에서 “가르침에 따른 원칙을 적용하면 그에 따라 쟁사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M104)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에 맞으면 적법한 것이고 맞지 않으면 비법인 것입니다. 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다수결의 원칙이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승가화합입니다.
승가화합은 양보와 타협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마치 정치인이 정치하듯이 양보와 타협으로 차선책을 추구한다면 보편적 가치관과 정반대의 것이 채택될 수 있습니다. 만일 국회에서 ‘전쟁’을 결의하였을 때 모든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 넣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승가의 화합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율장정신대로 사는 것입니다. 행정기관을 본 뜬 ‘총무원’을 만들어 놓고, 입법기관을 본 뜬 ‘종회’를 만들어 스님들이 정치행위를 한다면 정법이 쇠퇴하기 쉽습니다. 종교에서 정치한다는 것은 세속에서 정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최선이 아닌 차선이 선택되기 쉽습니다.
대중이 원하면 소도 잡아먹는다?
“대중이 원하면 소도 잡아먹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중공사에서 대중이 결정한 사항을 존중한다는 의미 일 것입니다. 그러나 소를 잡는 행위가 적법한지는 따져 봐야 합니다. 가장 먼저 대장로에게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없다면 경장과 율장을 열어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경장과 율장이 스승인 것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에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D16) 라 했습니다.
율장에서 다수결의 원칙 예부야시까는 철저하게 법과 율에 근거 합니다. 비법에 대한 쟁사가 발생하였을 때 세 번 제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백사갈마 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승가의 화합을 위해서는 비법이 발 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항상 최선을 추구해야만 하는 승가에서 ‘소도 잡아 먹는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종교인들은 항상 최선을 추구해야
종교인들이 정치를 해서는 안됩니다. 종교인들이 정치를 하면 세속화 됩니다. 종교인들이 정치를 하면 본질에서 멀어집니다. 정치에서는 양보와 타협의 산물로서 차선책을 내놓듯이 종교인이 정치를 하면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을 내 놓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법과 율이 변질 됩니다. 오늘날 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이라 한 것도 법과 율이 변질 된 것으로 차선책의 산물일 것입니다. 승가의 화합은 다름 아닌 법과 율을 지켜 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에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 했습니다. 종교인들은 항상 최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핵심인 것을 핵심인것이라 여기고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올바른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바로 핵심적인 것에 도달한다.” (Dhp12)
2016-07-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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