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페이스북은 지식인들의 놀이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30. 14:09

페이스북은 지식인들의 놀이터

 

 

나는 진실한 사람일까? 나는 솔직한 사람일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진실하고 솔직한 사람, 이런 사람을 줄여서 진솔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솔한 사람의 반대는 무엇일까? 거짓과 위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본래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진실하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음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에스앤에스(SNS)도 예외가 아니다.

 

페이스북은 에스앤에스의 대표주자이다. 한번 페이스북에 빠져 들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들락날락하는 것이다. 그런데 페이스북에 실려 있는 글을 보면 대부분 진실하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드러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갖춘 글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려 놓는다. 때로 불리한 것도 써 놓는다. 잘못한 것, 실수한 것 등을 창피를 무릅쓰고 올려 놓는다. 조금이라도 진실되고 솔직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비밀이 있다. 비밀은 함부로 털어 놓지 않는다. 절친이라면 비밀을 털어 놓아도 될 것이다. 왜 그런가? 비밀을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절친이 아니라면 비밀을 털어 놓지 말야 한다. 왜 그런가? 비밀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밀을 털어 놓는다는 것은 진실되고 솔직한 행위이다. 그런데 비밀을 지켜주지 않을 사람에게 털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책잡힐지도 모른다. 비밀이 약점으로 작용되어서 이용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절친의 조건은 비밀을 털어놓고, 비밀을 지켜주고, 불행에 처했을 때에 버리지 않고, 목숨도 그를 위해 버립니다.”(D31.16)라고 했다.

 

나에게 절친이 있을까? 아직까지 없는 것 같다. 인생의 길을 함께 가는 부부라면 어떨까? 아마 지키고 싶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하는 비밀은 누구나 한 두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에스앤에스에서 이런 비밀까지 털어 놓을 필요는 없다.

 

에스앤에스에 올라온 글을 보면 모두 행복으로 가득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 세상에 근심과 걱정은 없고 오로지 행복만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꽃을 올리는 사람, 자신의 일상을 담담하게 밝히는 사람, 먹거리를 자랑하는 사람 등 일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그 어디에도 고뇌하는 모습이나 성찰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일까?

 

어느 스님은 고고한 학처럼 보인다. 올린 글을 보면 차에 대한 것을 주로 올린다. 이런 차 저런 차 등 시식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고 차기에 대한 것도 올린다. 종종 선시에 대한 해설도 올린다. 신도들과 이야기한 것도 전한다. 그런 스님은 아무런 고뇌가 없는 것일까?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깨달음을 이룬 도인 아니면 거짓과 위선을 숨기는 사람일 것이다.

 

에스앤에스에는 시인들이 많다. 여기도 시인이고 저기도 시인이다. 시인들은 아름다운 시어로서 인생을 노래한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인생은 아름다운 것처럼 보인다. 정말 시인들은 문제가 없는 것일까?

 

에스앤에스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유리한 것은 드러내고 불리한 것은 감춘다. 자랑하고 싶은 것은 드러내고 부끄럽고 창피한 것은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이런 행위는 진실하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짓과 위선이다.

 

글을 쓸 때 유리한 것만 쓰지는 않는다. 때로 불리한 것도 쓴다. 부끄러운 이야기, 창피한 이야기도 올린다. 가능하면 진실되고 솔직하게 쓰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비밀까지 털어 놓지는 않는다. 에스앤에스 상에서 친구는 절친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지관리를 한다. 가능한 자신을 잘 보이고자 한다. 마치 거울을 보고서 잘 단장하는 것과 같다. 에스앤에스에 올린 글도 그렇다. 불리한 것은 빼 버리고 자랑하고 싶은 것만 올린다면 얼굴에 분칠하는 것과 같다. 과연 그 사람의 맨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기 힘들다. 그럼에도 알아보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법일까? 그것은 그 사람이 질문하고 성찰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자아에 세상에 대한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다. 한부류는 답을 잘하는 타입이고, 또 한부류는 질문을 잘하는 타입이다. 대부분 전자에 해당된다. 묻는 말에 질문을 잘하는 것이다. 문제를 잘 푸는 타입이 이에 해당된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게서 볼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모범생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리는 법은 없다. 기출문제를 외다시피 하여 시험을 잘 보았을 때 점수는 나올지 모르지만 거기서 머물렀을 때 한계가 있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늘 의문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이다. 교과서를 달달 외워서 답을 쓰는 타입과 다른 것이다. 이런 스타일은 대선주자에서도 볼 수 있다.

 

사법고시를 합격하여 검사로 일생을 보낸 대선주자가 있다. 그는 묻는 말에 답변은 잘한다. 예상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달달 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론에 나가면 밑천이 드러난다. 그토록 토론을 기피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토론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아는 것도 많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해당된다. 물론 답변 잘하는 사람도 토론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토론이 길어지면 침묵하게 되어 있다. 평소 자아와 세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하고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거침없을 것이다. 지혜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메일로 글을 받고 있는 것이 있다. 최진석 선생이 글을 보내 주는 새말새몸짓 뉴스레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대량메일이다. 어떤 연유로 인연이 되어서 종종 업무메일로 글을 받고 있다. 오늘 받은 것을 보니 질문에 대한 것이다.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발동시킬 수 있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질문이다. 대답이 아니다. 대답은 있는 이론이나 지식을 먹은 후 누가 더 많이 뱉어 내는가 혹은 누가 더 원형 그대로 뱉어 내는가 결정한다. 대답하는 사람은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지식과 이론이 머물다 가는 중간역이나 통로로 존재한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서 요동치다가 계속 머무르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다.”

 

 

이 글의 출처를 보니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148~151쪽 발췌라고 되어 있다. 이 글에서 강조한 것은 질문하는 삶에 대한 것이다. 누구나 대답은 잘하지만 질문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이라면 대답은 잘할 것이다. 중고등학교 학생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대답을 잘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회는 다르다. 사회에서는 대답 잘 하는 사람보다는 질문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하기 쉽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최진석 선생은 창의력이라고 했다.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것으로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질문은 다르다. 오로지 그 사람만 질문할 수 있다. 그래서 질문에 대하여 고유성으로 설명한다. 또한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된 것으로 창의성이 발휘된 것이다. 그래서 인류문명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에스앤에스에서 세상을 배운다고 말한다. 심산유곡에 살아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음을 말한다. 과연 페이스북에서 얼마나 세상을 배울 수 있을까? 유리한 것은 드러내고 불리한 것을 감추는 페이스북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하거나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성찰하는 글을 올렸다면 배울 만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매일 에스앤에스에 한 개 이상 글을 올리고 있다. 일감이 없으면 두 개도 올리고 세 개도 올린다. 대부분 긴 글이다. 긴 글을 읽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패스할 것이다. 그대신 감각적인 사진이나 짤막한 글을 매우 빠른 속도로 읽고 넘어갈 것이다.

 

에스앤에스에 글을 올릴 때 한가지라도 건질만한 글을 올리고자 한다. 그 결과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도 올린다. 때로 불리한 내용도 올린다. 진실하고 솔직한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찰하는 글이야말로 가장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페이스북에는 지식인들이 많다. 교수, 시인, 작가, 활동가, 성공한 사업가, 각계 전문가, 그리고 스님, 신부, 목사에 이르기 까지 이 땅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총망라 되어 있다. 그런데 올려진 글을 보면 마치 놀이터 같다. 지식인들의 놀이터를 말한다.

 

페이스북은 실시간 소통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긴 글은 환영받지 못한다. 감각적인 사진이나 글 위주가 될 수밖에 없다. 자랑하는 글도 보인다. 이미지 관리하는 글도 많다. 자아와 세상에 대하여 질문하거나 성찰하는 글은 거의 없다.

 

지식인이라면 자아와 세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질문하고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가? 이는 나는 자주 분노하는가, 자주 분노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는가,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지 않는가?”(A10.52)라는 등으로 성찰해야 한다.

 

질문하고 성찰해야 발전이 있다. 질문도 없고 성찰도 없으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된다. 팔십먹은 노인도 질문이 없고 성찰이 없으면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대답만 잘하는 가짜모범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남을 가르치려고만 드는 꼰대가 되어서도 안된다. 늘 자신과 주변에 대하여 질문하고, 자신에 대하여 성찰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 이런 글쓰기 했을 때 관심 보일 것이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지신인들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진실하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놀이터이다. 거짓과 위선의 놀이터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2021-08-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