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1263

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지금 시각 4시 15분, 글쓰기 딱 좋은 시간이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엄지치기 한다. 대강 시나리오는 정해졌으나 엄지 가는 대로 쓸 것이다. 삶에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성찰 없는 삶은 발전이 없다. 특히 자만으로 사는 삶이 그렇다. "내가 누군데?"라며 자만 했을 때 오늘은 어제의 연속일 것이다. 에스엔스에서 글을 보면 대부분 자만에 대한 것이다. 한상 거하게 차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식자랑, 손주자랑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일상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밝히는 사람도 있다. 성찰하고 반성하는 글은 보기 힘들다. 대부분 단점은 숨기고 장점은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자랑이 되기 쉽다. 자랑은 자만이 되기 쉽다. 우월적 자만이다. 태생적 자만, 배운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으..

담마의 거울 2023.01.31

오온이 윤회한다

오온이 윤회한다 그동안 헛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 보니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오로지 집과 직장밖에 몰랐던 시절을 말한다. 이를 잃어버린 20년 세월이라고 말해야 할까?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오늘 새벽에 한시간가량 읽었다. 읽다 보니 어제 읽은 것을 복습하는 셈이 되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다는 것이다. 이는 내용이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언제 보아도 새롭다. 마치 법구경을 보는 것 같다. 언제 열어보아도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디가니까야 18번경 ‘자나바싸바의 경’도 그렇다. 니까야를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다. 마치 해외여행 갔을 때 낯선 풍경을 보고..

담마의 거울 2023.01.29

여인 대처법 네 가지

여인 대처법 네 가지 인터넷에 글 쓰는 것도 허물이 되는 것 같다. 글이 어떤 이에게는 불편한 것 같다. 글이 길다고 멘트를 달았을 때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며칠전 글이 너무 길다고 불평한 사람이 있었다. 이에 "글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글이 길어서 불편하게 했다면 그 마음을 헤아려 누그러뜨려 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글이 길어서 충고받는 경우도 있다. 글이 길다는 것은 글 쓰는 시간도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A4로 폰트 사이즈 12로 하여 4페이지가량 자판을 치면 두세 시간 가량 걸린다. 두세 시간 동안 집중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글쓰기 삼매에 빠지는 것이다. 이럴때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이 길다고 충고했을 때 수용해야 할까? 수용..

담마의 거울 2023.01.18

앗따닷타 존자의 "뭣이 중헌디?"

앗따닷타 존자의 "뭣이 중헌디?" 이번에도 동시성을 경험했다. 오늘 경에서 읽은 내용이 논서에 똑같이 나왔다. 우연의 일치일까? 융의 동시성 이론이 또 한번 일어난 것 같다. 오늘 점심 때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을 읽었다. 쌀라 쌍수 아래에서 설법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최상의 공양에 대해 말씀하셨다. 꽃이나 향 등으로 불공하는 것보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앙받는 것은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

담마의 거울 2023.01.18

스님의 권위와 학자의 권위

스님의 권위와 학자의 권위 어제 장문의 글을 썼다. 새벽 5시 반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오전 10시에 끝났다. 무려 4시간 반 쓴 것이다. 대체로 만족했다. 경전과 논서, 법문집을 근거로 찰나삼매에 대해서 썼다. 글을 여기저기 옮겼다. 블로그와 페이스북, 카톡에 올렸다. 카톡에서 어떤 이가 위빠사나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가 있는 칼럼을 링크시켰다. 어느 교수가 교계신문에 미얀마 위빠사나 문제점에 대해서 쓴 것이다. 요지는 이렇다. 위빠사나는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미얀마 군부가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왜 이런 글을 링크시켰을까? 이유는 알고 있다. 사마타 선정없이 위빠사나만으로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사마타 선정에 대한 얘기는 많지만 미얀마 불교에서..

담마의 거울 2023.01.10

담마다사, 어떻게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볼 것인가?

담마다사, 어떻게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볼 것인가? 내 법명은 담마다사이다. 글을 쓸 때 실명과 함께 서명할 때 사용한다. 글을 마칠 때 날자와 함께 "담마다사 이병욱"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법명이 있다. 한자 법명도 있고 요즘에는 빠알리 법명도 있다. 물론 한자 법명도 있다. 2004년 불교교양대학 수계식할 때 받은 것이다. 그때 받은 법명은 성공(聖供)이다. 법명 성공은 사용하지 않았다. 블로그 초창기 때 두 세달 사용하다 그만 두었다. 너무나 흔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법명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성인 성(聖)자에 이바지할 공(供)인데 이는 성인을 받들어 모시라는 뜻이다. 불교교양대학 졸업자는 많았다. 그때 당시 한기수가 수백명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법명도 많..

담마의 거울 2023.01.07

확신에 찬 믿음으로 니까야를

확신에 찬 믿음으로 니까야를 지금 시각은 새벽 4시 18분, 행선을 끝내고 스탠드 불을 켰다.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를 읽기 위해서이다. 현재 16번경 마하빠리닙바나경을 읽고 있다. 몸이 찌뿌둥할 때 누워 있으면 망상만 일어난다. 이럴 때는 일어나야 한다. 몸과 마음을 다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행선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여기에 암송까지 하면 금상첨화가 된다. 몸과 마음이 이전과는 다른 상태가 되었다. 새벽에 이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못 잔 잠을 자야 할까? 에스엔에스나 유튜브를 해야 할까? 해야 할 일이 있다. 경전을 보는 것이다. 매일 틈만 나면 조금씩 진도를 나가는 디가니까야를 말한다. 현재 디가니까야를 딱 반 읽었다. 총 34경에서 16경이나 책을 보니 딱 절반이다. ..

담마의 거울 2023.01.06

지금 이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

지금 이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 머리맡에 읽고 있는 책이 있다. 그런 책중에 하나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다. 마하시사야도가 짓고 일창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미얀마어로 된 것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책이다. 일창스님은 미얀마어가 유창하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수행지침서이긴 하지만 주석서로서의 성격도 있다. 니까야와 청정도론을 근거로 한다. 책의 구조를 보면 청정도론 주석서처럼 보인다. 계, 정, 혜 삼학으로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계청정에 이런 글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건성으로 대하면서 계를 범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갑자기 죽게 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악처에 떨어지기 때문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1, 149쪽)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이다. 이는 누구든지 계는 목숨처럼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말이다...

담마의 거울 2023.01.04

법의 맛을 알면

법의 맛을 알면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이 길어진다. 가르침에 비추어 나의 경험을 대비시켜 보아 설명하고자 할 때 길어지는 것이다. 여기다 조금만 전문적인 술어가 들어가면 패스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경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경전은 쓰레기라는 것이다. 무엇이 그사람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경전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사람에게 있어서 경전은 그저 케케묵고 낡은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맛에 대한 갈애가 있다. 한번 맛본 것은 못잊는다. 한번 맛보면 다시 찾는다. 그래서 단골이 된다. 이 맛보다 저 맛이 더 뛰어나면 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기필코 달려간다. 그런데 맛에는 음식 맛만 있을까? 법의 맛도 있다. 이를 ..

담마의 거울 2022.12.27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지해라.” 이 말은 불자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다. 흔히 자귀의법귀의라고 말한다. 혹은 자등명법등명이라고 말한다. 정확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D16) 이 가르침은 매우 유명하다. 상윳따니까야 칸다상윳따에도 실려있고,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도 실려 있다. 니까야 도처에 실려 있다는 것은 중요한 가르침임을 말한다. 여기서 자귀의 의미는 무엇일까? 법귀의는 알만하지만 자신을 의지처로 하라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불자들은 자귀의, 즉 자신에게 ..

담마의 거울 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