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1263

디가니까야 대장정 7개월 보름

디가니까야 대장정 7개월 보름 디가니까야를 다 읽었다. 작년 2022년 10월 16일부터 읽기 시작했다. 오늘 2023년 6월 1일 마침내 7개월 보름만에 대장정을 마쳤다. 니까야 읽기를 장정으로 비유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연안대장정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난의 행군이 연상된다. 대장정(大長程)의 본래 의미는 "멀고먼 길을 감"의 뜻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6개월간의 북극 탐험 대장정에 들어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방학을 맞아 그녀는 해남의 땅끝 마을에서 임진각에 이르는 국토 순례의 대장정에 참여하기로 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오토바이로 대륙을 횡단한다. 이것도 대장정일 것이다. 멀고도 힘든 여정이다. 그런데 대장정이 반드시 육체적 노고만을 뜻하지는 ..

담마의 거울 2023.06.01

즐기는데 한계가 없는 도박

즐기는데 한계가 없는 도박 고요한 새벽이다. 대로변이라 종종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상대적으로 자동차 소리는 작다. 요즘 자동차 성능이 좋아서일까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다. 새벽에는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다. 행선을 하든 좌선을 하든 집중이 잘 된다. 집중이 잘 되니 사띠도 잘 된다. 방금 전 일도 떠오르고 오래 전 일도 떠오른다. 대개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당연히 담마에 대한 것도 있다. 요즘 의무적으로 경전을 읽고 있다. 머리맡에 디가니까야가 있어서 틈 날 때마다 읽고 있다. 천천히 읽는다. 한두페이지가 고작이다. 진리의 말씀을 소설 읽듯이 읽을 수 없다. 하나씩 새겨서 읽다보니 진도가 더디다. 수많은 경을 읽었다. 모두 새겨야 할 내용이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모두 기억해..

담마의 거울 2023.04.12

불교에서 신통의 기적이란?

불교에서 신통의 기적이란? 신통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는 수많은 신통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신통이나 초월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기피한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적인 이야기도 기피한다. 그러다 보니 수용하는 경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염처경과 같은 수행에 대한 경이 고작일 것이다. 신통을 비난하는 자는 신통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까야를 읽지 않는 자가 니까야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신통을 비난하는 자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해 주어야 할까? 신통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네 번째 선정에 들어서 신통을 체험해 보십시오.”라고 말하면 된다. 신통은 네 번째 선정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고 한다. 마음을 한곳에 집..

담마의 거울 2023.03.27

맛의 갈애로 인한 불평등의 기원

맛의 갈애로 인한 불평등의 기원 또다시 새벽이다. 새벽에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생각을 놓칠 수 없다. 달아나기 전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 글로 써서 꽁꽁 붙들어 매어 두어야 한다. 사람은 발전이 있어야 한다.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되어야 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을 것이라면 변화가 없다. 아니 퇴보하고 말 것이다. 머리가 흰 사람이라면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제 보다 나은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찰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사유가 있는 삶이다. 새벽에 사유하면 성찰 있는 삶이 된다. 사유한 것을 글로 옮기면 최상이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제 보다 다른 삶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똑같은 글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담마의 거울 2023.03.16

고락중도가 팔정도인 이유는

고락중도가 팔정도인 이유는 양극단이 있다. 대표적으로 쾌락과 고행을 들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과 고행을 즐기는 것은 정반대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양극단이라 하여 부정했다. 양극단은 왜 문제가 되는가?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라고 했다. 또한 고행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라고 했다. 쾌락과 고행은 공통적으로 무익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자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 극단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일반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 고행을 추구하는 ..

담마의 거울 2023.03.11

법회 의식할 때 초전법륜경을 독송하자

법회 의식할 때 초전법륜경을 독송하자 내 기억력에 문제 있는 것일까?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 버렸다. 어제까지 잘 되던 것이 오늘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안에서 열어 주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것도 연속으로 세 차례 겪었다. 정말 내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파트에는 두 개의 비밀번호가 있다. 동 입구 현관에 하나 있고, 집 입구 현관에 하나 있다. 동 입구에 있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 손 때가 묻었기 때문이다. 아무생각없이 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집 현관 비밀번호는 손 때가 묻지 않았다. 기억해서 눌러야 한다. 외기도 어렵다. 번호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위치는 기억난다. 위치만 기억해서 누르다가 사고가 난 것 같다. 비밀번호 사건을 겪자 덜..

담마의 거울 2023.03.10

법념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념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근 디가니까야 대념처경을 읽었다. 사념처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법념처이다. 법념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디가니까야를 처음부터 읽고 있다. 이전에는 필요한 것만 읽었다. 글을 쓸 때 필요 문구를 인용할 때 관련부분만 읽어 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도있게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식의 경전읽기는 도움이 안된다. 경전은 새기며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도 나가듯이 읽어야 한다. 매일 한두페이지라도 꾸준히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새기며 읽어야 한다. 각주까지 빠짐없이 읽어야 한다. 이러다 보니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없다. 법념처를 읽고 법념처에 대해서 숙고해 보았다.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는 구분이 뚜렸해서 어떤 것인지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법..

담마의 거울 2023.02.26

업자성정견과 중생중도

업자성정견과 중생중도 중도란 무엇일까? 중도는 가운데 길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중도는 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길이다. 양극단을 초월한 것이다. 어떻게 초월하는가? 십이연기로 초월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십이연기 환멸문으로 초월한 것이다. 이 세상을 초월한 것이 중도이다. 욕계의 세상에서 초월하면 무욕에 이를 것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이다. 건너 가는 것이 초월이다. 왜 초월이라 하는가? 정신적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소용돌이 치는 폭류에서 헤엄쳐 건널 수 없다. 뗏목을 엮어 건너야 한다. 가르침의 뗏목이다. 이는 다름아닌 팔정도의 뗏목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중도를 팔정도라고 했다. 열반의 언덕으로 이끌어 주는 가르침의 뗏목을 말한다. 양극단은 피해야 한다. ..

담마의 거울 2023.02.21

코끼리 조련사가 되어야

코끼리 조련사가 되어야 인생은 깨달음의 연속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지혜도 생겨나는 것 같다. 아둔한 자라도 삶에서 산전수전을 겪고 나면 지혜가 생겨난다. 인생을 시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가 될 것이다. 생물학적 구분이다. 중국에서는 약관, 불혹, 지천명, 이순 등으로 구분했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열 단계로 구분했다. 1) 유아적 십년(0-10세) 여리고 불안정한 아이 2) 유희적 십년(11-20세) 그는 많은 유희를 즐긴다. 3) 미모적 십년(21-30세) 그에게 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4) 체력적 십년(31-40세) 힘과 기력이 크게 생겨난다. 5) 지혜적 십년(41-50세) 그에게 지혜가 잘 확립되는데, 선천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

담마의 거울 2023.02.10

스마트폰은 괴로워 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H스님은 K스님의 잘못을 지적했다. 목탁은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연히 책상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괴로워하는 존재는 유정중생이다. 삼법인 중에 일체개고가 있다. 이는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8)라는 가르침에서도 볼 수 있다. 일체가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ṅkhārā dukkhā)”라고 했다. 일체라고 했으니 모든 것(sabbe)이 해당된다. 목탁도 일체에 해당되고 책상도 일체에 해당된다. 이런 논리라면 당연히 목탁도 괴로워해야 하고 책상도 괴로워해야 할 것이다. 괴로움의 본질이 있다. 이를 니까야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세가지 괴로움이 있다...

담마의 거울 2023.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