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명상이 일상이 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14. 08:32

명상이 일상이 되고자

 

 

햇살 강렬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일요일임에도 나와서 자판을 두드린다. 오래 된 것이다. 멈출 수가 없다.

 

이른 아침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전에는 글을 썼다. 그러나 자제한다. 글쓰기 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명상하는 것이다.

 

명상, 이렇게 말하면 거창한 것 같다. 참선이라고 말하면 동떨어진 것 같다. 수행이라고 말하면 또 어떨까? 무언가 큰일을 하는 것 같다.

 

명상, 참선, 수행, 모두 같은 의미이다. 홀로 하는데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에 있어서 그런 것이다.

 

아침에 행선과 좌선을 하기로 했다. 나에게 있어서 수행은 행선과 좌선이다. 그러나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수행이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아침에 글 쓰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수행을 했다. 먼저 행선을 했다. 그 다음에 좌선을 했다.

 

행선할 때는 행선대에서 한다. 사무실 한켠 벽면에 점선 줄을 만들어 놓고 걷는 것이다. 전선 봉합할 때 쓰이는 탄력 있는 검정 테이프를 바닥에 30센티 간격으로 붙였다.

 

 

행선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발을 한발 한발 뗄 때 오로지 발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이때 발의 움직임은 물질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발이 움직이는 것을 아는 마음은 정신적 현상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여섯 문에서 발생하는 정신과 물질 현상을 새기는 것이다. 발의 움직임을 새기고, 또한 발의 움직임을 아는 마음을 새긴다. 이렇게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새기다 보면 잡념이 일어날 수 없다. 번뇌가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서두르면 안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서두름은 금물이다. 뛰어가서도 안된다. 천천히 걸어야 한다. 새김을 유지하며 걷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상이 수행이 된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해서는 안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면 사고나 나게 되어 있다.

 

어느 법우님이 다리를 다쳤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다가 발을 헛딛어 넘어진 것이다. 대가는 컸다. 기부스를 하고 여러 주 집에만 있어야 했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한손에 무언가를 하나 들고 또 한손에 무언가를 들어서 시간을 절약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할 수 없다. 한순간에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

 

한순간은 한마음이다. 한마음에서 탐욕과 성냄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이것 저것 잡고 이것 저것을 동시에 처리하려 하고자 한다면 사고가 난다.

 

행선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만 하는 것이다. 발을 뗄 때 때는 것을 새기고, 발을 뗄 때 떼는 것을 아는 마음을 새겨야 한다. 물질과 정신적 현상을 새기는 것이다.

 

마음은 대단히 빠르게 일어난다. 빠르게 생멸하는 마음을 새겨야 한다. 이를 순간집중, 순간삼매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카니까사마디(khaikasamādhi)가 된다.

 

순간삼매는 좌선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배가 부풀어 오를 때 한번에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잘 관찰하면 단계가 있다. 순간착해야 한다. 순간포착은 어쩌면 카니까사마디에 따른 것인지 모른다.

 

마음은 가만 있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끊임 없는 일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 불선(不善)한 일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마치 엔트로피법칙 같은 것이다. 무질서로 가는 것이다.

 

마음은 제어해야 한다. 마음은 제어하지 않으면 늘 불선한 대상에 가 있다.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살아간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간다. 그런데 아무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산다면 불선업을 짓게 된다. 왜 그런가? 제어되지 않는 마음은 늘 불선대상에 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수행은 마음을 제어하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싸띠(sati)수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이 불선대상으로 가 있는 것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싸띠를 새김이라고 말한다. 새김이 유지 되고 있으면 마음은 불선한 대상에 가 있지 않는다. 탐욕을 탐욕이라고 알았을 때 탐욕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수행은 수행처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이라 하여 행선하고 좌선하는 것만 것 말하지 않는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일상에서 새김을 유지하고자 한다. 잘 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새김을 놓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아라한이라고 해야 한다.

 

범부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 범부들은 무심코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탐욕의 살고, 성냄으로 살고, 어리석음으로 살아간다.

 

범부들은 매일 매순간 불선업을 짓는다. 마음을 제어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 보면 마음은 늘 불선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불선업을 짓는 것이다.

 

범부들이 장수하면 어떻게 될까? 불선업만 쌓여 갈 것이다. , , 치로 사는 세월을 살았을 때 불선업만 쌓는 삶이 된다.

 

불선업을 쌓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이 지은 업대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악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현실에서는 어떠할까?

 

불선업의 살면 괴롭다. 아무 생각없이, 무심코, 내키는 대로 살았을 때 불선업을 짓게 된다. 그런데 불선업은 받드시 불선과보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불선과보는 어떻게 나타날까? 지금 여기서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감각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즐거움이 오래 가지 불만이다. 이것도 괴로움의 범주에 해당된다.

 

새김이 유지되면 괴롭지 않다. 새김이 유지되면 선업을 짓게 된다. 왜 그런가? 자신의 행위를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신과 물질적 현상을 알아차린다.

 

새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챙김이라 하여 알아차림 명상을 한다고 하지만 스트레스 해소와 같은 정신적 현상을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챙김 명상은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 모두를 싸띠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정신과전문의가 개발한 스트레스해소 명상기법은 불교의 명상과 다른 것이다. 극히 일부만 채택된 것이어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번뇌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새김하는 것은 위빠사나명상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이 두 가지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명상인 것이다.

 

명상은 일상이 되어야 한다. 여러 명 있는 수행처 명상홀에서 앉아 있는 것만이 명상이 아니다. 명상은 보여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백권당에는 행선대도 있고 좌선대도 있다. 혼자만의 공간이다. 수행처 명상홀에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행선도 하고 좌선도 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기도하면 돋보일 것이다. 마치 연예인이 연기하는 것과 같다.

 

명상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명상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여기에 타인이 개입할 수 없다.

 

하루를 명상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아침을 먹고 나면 커피 한잔 마시고 바로 행선에 들어간다. 그리고 좌선을 한다. 이렇게 해야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글은 일상이 되었다. 누가 보건 말건 쓰는 것이다. 독자를 위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소설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글로 돈벌이하는 사람이 아니다.

 

명상은 일상이 되어야 한다. 누가 보건 말건 백권당에서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그렇게 하도록 사무실 공간을 반으로 나누었다.

 

명상이 일상이 되려면 행, , , 와 구분이 없어야 한다. 반드시 앉아 있어야만 명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선도 명상이 되듯이 길거리 걸어 갈 때도 명상이 되어야 한다. 여섯 가지 문에서 일어나는 물질과 정신 현상을 새기는 것이다.

 

일상이 명상이 되고자 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지 않고자 한다. 내가 하는 행위 모두에 대하여 새김하고자 한다. 언제나 나는 명상이 일상이 될 수 있을까?

 

 

2024-07-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