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 현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18. 11:40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 현자

 

 

안거가 끝났다고 해서 명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늘 아침에도 행선 이십분, 좌선 이십분 했다. 앞으로도 이런 삶은 계속 된다.

 

오늘 아침 행선하면서 하나 발견한 것이 있다. 서 있을 때 몸을 스캔(scan)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전에는 눈, , 입술, , 무릎, 발바닥, 이렇게 여섯 군데를 봤었다. 오늘 아침에는 코와 무릎을 생략하고 눈, 입술, , 발바닥, 이렇게 네 군데만 봤다.

 

서 있을 때 네 군데 본 것은 매우 효율적이다. 어쩌면 가장 강한 대상인지 모른다. 위빠사나 수행은 강한 대상이 주관찰대상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눈의 촉촉함, 입술의 맞닿음, 배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발바닥의 차가움과 딱딱함은 강한 관찰 대상이 된다.

 

한번 방법을 알면 그 방법대로 하게 되어 있다. 행선하다 서 있을 때 네 군데 관찰대상은 강한 대상이기 때문에 쉽게 마음이 간다. 그것도 순식간이다. 마음에는 거리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마음은 순간 이동하듯이 대상에 가 있다. 이런 것도 새겨야 할 대상이다. 어떻게 새기는가? 명색을 새기는 것이다. 눈의 촉촉함이라는 물질적 과정과 눈의 촉촉함을 아는 앎인 정신적 과정을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은 모든 변화하는 과정에 대하여 명색으로 각각 따로따로 새겨야 한다.

 

 

행선이 끝나면 자리에 앉는다. 금강좌에 앉아서 배의 움직임을 본다. 왜 복부인가? 명색을 보기 쉽기 때문이다. 만약 코의 호흡을 본다면 이는 위빠사나가 아니라 사마타가 된다. 단지 들숨날숨 그 자체만을 대상으로 해서 몰입한다면 법의 성품을 보기 어렵다.

 

법의 성품을 보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을 주관찰 대상으로 하여 명색을 새기는 것이다. 배의 부품이 있다면, 배의 부품은 물질적 현상이고, 배의 부품을 아는 앎이 있는데 이는 정신적 현상이다. 그래서 배의 부품에 대하여 물질적 과정으로 새기고, 앎에 대하여 정신적 과정으로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다. 배의 부품에 대하여 물질 따로 정신 따로 새기는 것이다.

 

명색을 새기면 명색이 끊어질 수 있다. 그것이 열반이다. 명색이 끊어질 때까지 새기고 또 새겨야 한다. 새기고 새기다 보면 어느 때 정신적 과정과 물질적 과정이 끊어질 때가 오지 않을까?

 

20241011일 금요니까야모임

 

평온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막 좌선을 끝낸 상태에서 하얀 여백을 대한다. 매일 하나 이상 글을 의무적으로 써야 하기 때문에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라도 써야 한다. 오늘 쓸 주제는 생각해 두었다. 지난주 금요일 있었던 금요니까야모임에 대한 것이다.

 

20241011일 금요니까야모임이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있었다금요니까야모임에 참여하면서 교정작업도 하고 있다. 이번에 통합본 쌍윳따니까야를 전재성 선생에게 전달해 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보면서 교정도 함께 본 것이다. 개정판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것도 모임에 나가는 보람중의 하나이다.

 

이번 모임에서는 두 개의 합송했다. 교재 오늘부처님께 묻는다면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삶을 성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열반의 바다로 어떻게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각각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S35.238)과 통나무의 비유에 대한 경1’(S35.241)에 해당된다.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은 매우 유명한 경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독사, 살인자 등으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광채가 치열하고 맹독을 내뿜는 네 마리의 뱀을 두려워하고 다섯 명의 살인자인 원수를 두려워하고 여섯 번째의 칼을 뽑아든 강도 살인자를 두려워하고 마을을 약탈하는 도둑들을 두려워하여 여기저기로 도망가다가, 거기서 크고 넓은 물을 만났는데, 이 언덕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고 저 언덕은 안온과 평화로 가득 찼으나 타고 건너야 할 배나 걸어서 왕래할 수 있는 다리가 없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S35.238)

 

 

이 대목을 보면 대승경전에 있는 안수정등(岸樹井藤)’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나그네가 광야를 거닐다가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는 경에서 그 사람은 광채가 치열하고 맹독을 내뿜는 네 마리의 뱀을 두려워하여 여기저기 도망칠 것이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이렇게 본다면 안수정등이야기는 쌍윳따니까야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S35.238)을 모티브로 한 것처럼 보여진다.

 

대승경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 상당수는 초기경전에서 발견된다. 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수정등이야기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본다. 단지 비유의 대상만 다를 뿐이다. 코끼리에 쫓기는 자와 네 마리 맹독을 가진 독사에 쫓기는 것이 다를 뿐이다.

 

몸 안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있다는데

 

이 몸은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대에 대하여 맹독을 가진 네 마리 독사와도 같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몸 안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있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물려 죽을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눈이 있는 것은 보는 기능도 있기는 하지만 보는 것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은 조물주가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기능을 만들어 놓은 것은 마음껏 즐기라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오욕락을 즐긴다. 눈이 있어서 눈으로 형상을 즐기고, 귀가 있어서 아름다운 소리를 즐긴다. 몸이 있어서 감촉을 즐기기도 한다. 이처럼 감각을 즐기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 경에서는 삶을 바라고 죽음을 원하지 않고 즐거움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S35.238)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람들은 행복을 바란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되길 바라고, 지금 불행한 자는 이 괴로움이 어서 끝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일종의 감각적 행복에 대한 것이다. 이를 오욕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눈과 귀 등으로 감각을 즐기는 행복을 말한다. 이런 행복을 달리 말하면 즐거움이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과 즐거움은 사실상 동의와 같다. 지금 네 마리 독사에 쫓기고 있는 자는 즐거움을 바라는 사람이다. 이는 행복을 바라는 사람과 같다. 당연히 괴로움을 바라지 않고 불행도 바라지 않는다. 이 행복이 계속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죽음도 바라지 않는다.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른바 영원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 , , 풍 사대라는 네 마리 독사에 쫓기는 자는 영원주의자이다. 안수정등에서는 코끼리에 쫓기는 자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러나 코끼리가 사대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쌍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비유가 더 구체적이다.

 

해법을 제시하는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은 이 몸 보기를 독사 보듯 하라고 했다. 언제든지 물릴 수 있음을 말한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 즐거움을 행복으로 여기는 자는 언제든지 물릴 수 있어서 쫓기는 자의 신세가 된다. 그렇다면 독사에 물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삶을 바라고 죽음을 원하지 않고 즐거움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S35.238)과 반대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이 몸과 마음을 독사, 살인자로 보아서 저 언덕으로 가라는 것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로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이와 같이여기 커다란 물이 있는데 이 언덕은 위험하고 두렵고 저 언덕은 안온하고 두려움이 없지 만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할 것이다.”(S35.238)

 

 

이 비유를 보면 안수정등에서 우물에 빠진 나그네가 연상된다. 우물 안은 이 언덕이고 우물 밖은 저 언덕으로 될 것이다. 그런데 안수정등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쏟아져 나와 온몸을 쏘아대고두 마리 쥐가 쉬지 않고 뿌리를 갉아먹고사방에서 독사들이 쉭쉭거리고사나운 들불이 일어나 광야를 태우는 데도 그는 눈을 꼭 감고 바람이 다시 불기만 기다렸다다섯 방울의 꿀맛만 기억하고그 맛을 다시 볼 순간만 기약한 채 그는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나의 삶도 이 나그네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岸樹井藤, 불설비유경, 부처님 생애, 조계종 교육원)”

 

 

마치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문제만 제기하지 않는다. 해법을 제시한다. 이는 사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만 내놓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설해서 해법까지 제시했다. 만약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문제만 제기했다면 가르침의 수레바퀴는 오늘날까지 굴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 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면,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서 거룩한 이로서 땅 위에 섰을 것이다.” (S35.238)

 

 

이 언덕과 저 언덕에는 커다란 물이 있다. 그것도 거세게 흐르는 폭류이다. 헤엄쳐서는 건너갈 수 없다. 뗏목을 이용해서 건너는 것이다. 어떤 뗏목인가? 팔정도의 뗏목이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많은 비유가 있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이 경에서의 비유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맹독을 내뿜는 네 마리의 뱀은 네 가지 광대한 존재, 즉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를 말한다.”

 

2)”다섯 명의 살인자인 원수는 존재의 집착다발, 즉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 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을 말한다.”

3) “여섯 번째의 칼을 빼든 살인강도는 환락과 탐욕을 말한다.”

4) “텅 빈 마을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을 말한다.”

5) “마을을 약탈하는 도둑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외적인 감역을 말한다.”

6)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7)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한다는 것은 바로 정진과 노력을 말한다.”

8) “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사대를 독사로, 오온을 살인자로, 환락과 탐역을 살인강도로, 내적 감역을 텅 빈 마을로, 외적 감역을 도둑으로, 팔정도를 뗏목으로, 정진과 노력을 두 손과 두 발로, 그리고 아라한에 대하여 피안으로 건너가서 서 있는 거룩한 자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비유는 안수정등에서의 의문제기로 끝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어떤 모임에서든지 토론의 규칙이

 

경을 합송하고 나면 전재성 선생의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질문이 이어진다. 때로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질문은 길지 않다. 토론도 길지 않다. 그것은 암묵적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모임에서든지 토론의 규칙이 있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는 되도록이면 질문을 일분 이내로 짧게 한다. 그리고 연이어서 질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칙이 깨질 때가 있다. 새로 온 사람이 왕성한 질문과 연이은 질문을 할 때 귀중한 시간이 허비되는 것이다. 이럴 때 전재성 선생 설명 들으러 왔지 그 사람 이야기 들으러 왔나?”라며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된다.

 

L선생의 죄충우돌식 질문

 

경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L선생의 질문이 있었다. L선생은 계율문제에 대해서 질문 했다. 계율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심오한 경전을 배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회의한 것이다.

 

모임은 오래 되었다. 20172월부터 시작되었으니 이제 만 7년이 넘은 것이다. 매달 두 번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고정멤버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토론 과정에서 불쾌나 불편은 거의 없다. 화합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처음 온 사람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치 않은 것 같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내 놓는 것이다.

 

L선생은 육처에 대하여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로 보고 이를 인식된 것으로 보았다, 이는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이는 색, , , , , 법에 대해서도 인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일체유심조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충돌이 발생된다.

 

계율도 지키지 않은 자가 경전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L선생은 갑자기 계율문제를 제기했다. 계청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자가 심오한 경전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했을 때 경전을 읽고 듣고 토론하는 것이 쓸 데 없는 짓이 되어 버린다.

 

전재성 선생은 L선생의 계에 대한 의문 제기에 학습계율로 설명했다. 금요니까야모임에 오래 전부터 나온 사람이라면 수도 없이 들어 본 이야기이다. 계는 단번에 지켜 지지 않기 때문에 마치 학습하듯이, 훈련하듯이 지켜짐을 말한다. 그래서 평생 걸려 완성되는 것이 계율이라고 했다.

 

평생걸려 완성되는 것이 학습계율이라면 출가수행승의 계율은 완벽히 갖추어진 상태는 아니다. 그렇다고 심오한 경전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계율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L선생은 오계도 지키지 않은 자가 경전공부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말이 많으면 말이 많다고 비난하고

 

L선생의 도발적인 언행은 계속 되었다. 하나의 주제를 설정해 놓고 토론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게는 답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생각을 길게 이야기했다. 이런 태도에 사람들은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L선생의 자유토론하자고 했다. 그러나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침묵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토론하는 방식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 했다. 자신이 경을 다시 한번 읽어 보니 다들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계속 길게 이어 나갔다.

 

L선생의 이야기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H선생이 문사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응해 주었다. 대승에서는 듣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공부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L선생은 이 말을 듣자 강하게 비난했다. 자신을 교육시키려 한다며 꼰대나 하는 짓이다라고 비난한 것이다.

 

토론이 말싸움이 될 수 있다. 말싸움이 감정싸움이 되면 난장판이 될 수 있다. 참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H선생은 노련했다. 즉각 상황파악을 하고서는 저의 말에 불편 했다면 사과 드립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더 이상 논란은 없었다.

 

공직경력을 내세웠을 때

 

L선생은 이런 모임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경을 읽고 설명을 듣고 질문을 하고 토론하는 방식을 말한다. L선생이 보기에는 이것은 토론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토론방식을 바꾸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L선생의 파격에 모두 당황스러워 했다. 대부분 눈을 감고 있었다. 반론을 제기하면 강한 비난이 따랐다. 이에 K선생이 한마디 했다. 견해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양성을 말한다. 경을 읽고서 이런 저런 자신의 생각을 내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L선생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비난에 가까운 말을 했다. 그러면서 제가 공직을 정년퇴임 했는데라든가, “인권관련 일을 했는데라며 자신의 공직경력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공직을 해 본적이 없다. 공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공직에 있으면서 정년으로 퇴임 했다면 고위직에 있었을 것이다. 부하들을 다루는 법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L선생을 보면 마치 고위공직자가 부하들에게 한마디 하는 식으로 비추어졌는데 나만 그런 것일까?

 

말이 없으면 말이 없다고 비난하고

 

L선생의 토론방식으로 인하여 진도는 나가지 못했다. L선생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어야만 했다. 나서면 큰 일 날 것 같았다.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란 것이다. 이런 것이 불만이었는지 이번에는 사람들이 비겁합니다.”라고 말했다. 토론하지 않고 눈만 감고 있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L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치 선생에게 훈계 받는 것 같았다. 공직으로 정년 퇴임을 했음을 밝히면서 말하는 것에는 권위가 느껴졌다. 말을 하면 꼰대라고 비난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하나

 

인생에 대한 해법을 부처님 가르침에서 찾는다. 놀랍게도 경전을 보면 해법이 이미 나와 있다. 말에 대한 것도 그렇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아뚤라여, 이것은 오래된 것이니
지금 단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Dhp.227)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말을 많이 하면 말이 많다고 비난 한다. 가만 입 다물고 있으면 침묵한다고 비난하다. 중간으로 말해도 비난한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까?

부처님도 비난 받았다. 부처님이 진리를 설할 때 때로 길게 설했고 때로 침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사람들은 길면 길다고 비난하고, 침묵하면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중간으로 말하면 중간으로 말한다고 비난했다. 주석에 따르면, 부차님은어리석은 자들이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고려할 것이 못된다.”(DhpA.III.325-329)라고 했다.

 

공직자출신의 안하무인격 언행에는

 

공직자출신의 안하무인격 언행에 불쾌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맞대응 했다면 난장판 되었을 것이다.

 

H선생은 꼰대같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받았지만 참아 내었다. 오히려 사과까지 했다. H선생의 내공이 엿보인다. K선생은 다양성을 말하며 점잖게 우회적으로 말했다.

 

대부분 침묵했다. 못나서 가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은 것이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그대 자신이 동요하지 않으면,
그것이 열반에 이른 것이니
격정은 그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Dhp134)

 

 

금이 간 놋쇠 그릇이 있다. 때려도 소리가 잘 나지 않을 것이다. 종은 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깨진 종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소리가 잘 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땅 바닥에 있다면 어떤 소리가 날까? 아마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비난에 대하여 깨진 놋쇠그릇처럼 동요하지 말라고 했다.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 현자

 

현자들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난과 칭찬에 대해서는 바위산처럼 살라고 했다.

 

비난을 하면 깨진 종처럼 반응을 보이면 그뿐이다. 땅 바닥에 버려진 깨진 종은 아무리 쳐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칭찬하는 것에 고무되어서도 안된다. 바위산처럼 살아야 한다.

 

 

현자들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Dhp81)라고 했다.

 

 

2024-10-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