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근불가원정치 108

뉴스없이 살아보니

뉴스없이 살아보니 요즘 뉴스 공포증에 걸린 것 같다. 뉴스를 기피하다 보니 식당에 들어 가는 것도 부담스럽다. 이발소도 예외가 아니다. 한달에 한번 이발한다. 단골 이발소가 있다. 아파트 부근 과천이발관이다. 안양에서 왜 과천 이발관인가? 과천 아파트가 재건축됨에 따라 잠시 안양으로 이전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굳어졌다고 한다. 과천 단골손님도 일부로 찾아온다고 한다. 안양에서는 월요일 쉬는데 화요일에 쉰다. 과천이발은 십년 이상 다녔다. 미용실이나 체인점과 달리 나이 든 아저씨가 깍아 준다. 아저씨라 하지만 나이가 꽤 되는 것 같다. 아마 70은 넘은 것 같다. 항상 넥타이에 흰 와이셔츠 차림이다. 오래 봐서 그런지 나이를 먹지 않은 것 같다. 이발비용은 커트만 하는데 7천원이다. 자신의 가게이기 때..

분노유발자들을 보면

분노유발자들을 보면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얼핏 보인다. 어느 보수 종이신문 1면을 우연히 보았다. 주먹 만한 활자만 본 것이다.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목을 뽑아낸 것임에 틀림없다.오늘날 신문은 분노유발자 같다. 보수신문이건 진보신문이건 분노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보수신문을 보지 않았으나 요즘에는 진보신문 마저 보지 않는다.신문은 물론 TV뉴스도 보지 않는다. 유튜브도 보지 않는다. 분노를 유발하는 것들을 일체 보지 않는다. 그러나 카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에스엔에스까지 보지 않을 수 없다.카톡방이 시끄럽다. 어떤 이가 리스트를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패배 요인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 같다. 수십명 된다. 다 보지 않았다. 이에 어떤 이가 자제해 줄 것을 당부했..

허전하고 텅 빈 마음에

허전하고 텅 빈 마음에 오늘 아침 올린 글이 위로가 되었나 보다. 페이스북 댓글에 '위로의 글 감사하다'는 글이 많다. 허전하고 텅 빈 마음에 무언가 채워 넣어야 했는데 딱 맞아 떨어진 모양이다. 허전한 마음은 꽤 오래 갈 것이다. 일단 매스콤을 차단해야 한다. 당분간 뉴스를 보지 말아야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원한 맺힌 자에게는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A5.161)라고 했다. 뉴스를 보면 그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혐오와 증오가 일어난다. 이럴 때는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 대하여 기억을 하지 않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asatiamanasikāra)’이다. 한마디로 그 사람들에 대해서 신..

비법이 득세한 세상에서

비법이 득세한 세상에서 참으로 아쉬운 밤이었다. 훗날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담마아닌 것이 담마를 이겼다고 할지 모른다. 비법이 득세한 세상이 된 것이다. 근소한 표차이로 지긴 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은 모두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마치 전투하듯이 전쟁아닌 전쟁을 치루었다. 진보적 가치, 민주적 이념이 끝까지 할 것 같았지만 다수결이라는 원칙에 무참히 깨졌다. 한국에 보수와 진보는 있기나 한 것일까? 진정한 진보도 진정한 보수도 없다. 계급과 지역만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무능력자도 대통령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이번 대선도 예외가 아니다.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말이 있다. 모든 면에 있어서 한국은 역동적이라는 말이다. 선거로 세상을 바꾸는데 있어서 ..

글로서 밭 갈았다

글로서 밭 갈았다 평온한 일터의 아침이다. 대선 선거날 아침이기도 하다. 선거를 마치고 원두카피를 내려 마시며 있다. 원두향 가득한 절구커피를 말한다. 절구질해서 만든 것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일까 맛이 난다. 오늘 2022년 3월 9일 8시에 투표했다. 안양 비산2동 롯데케슬아파트 경로당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 것이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투표할까? 이럴 때 유권자의 한표는 무섭다. 이번에 이재명에게 한표 주었다. 이재명을 주목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작년 민주당경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막연하게 알았다. 사이다성 발언을 하는 지자체장 정도로 알았다. 하나 더 있다. 그것은 2019년 서초동 촛불 때 이재명 구명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이재명 구..

절박함으로 투표대열에 동참했을 때

절박함으로 투표대열에 동참했을 때 오랜만에 걸어서 일터에 갔다. 절기상으로는 봄이다. 또한 3월 신학기이다. 날씨도 춥지 않아 걸을만하다. 덕천초등학교 입구에 아이들과 엄마들이 한무더기 모여 있다.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자녀의 등교길을 함께 하는 것이다. 모처럼 아이들을 본다. 오전 9시가 다 된 시간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방에서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기 힘들고 노인들만 남아서 소멸을 걱정하지만 경기도 수도권 남부 도시는 예외인 것 같다. 걸어서 일터로 갈 때 빠나다경 10게송을 암송했다. 새벽에 두 번 암송한 것을 천천히 걸으면서 나지막이 입으로 소리 내며 간 것이다. 한번 외워진 것은 잊어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백번을 외워야 한다. 그러면 사진처럼 선명하게 박힌다. 이를 포토메모리라고..

후보의 연설에서 자신감을, 이재명이 안양에 온 날

후보의 연설에서 자신감을, 이재명이 안양에 온 날 “여러분, 경제를 살릴 후보 누구입니까?” “이재명이요!” 이어서 “이재명, 이재명,…”이라며 연호가 이어 졌다. 2022년 2월 20일 오후 1시 50분경 안양 평촌중앙공원에서 있었던 이재명 후보의 연설이 있었다. 시간을 잘못 파악했었다. 오늘 오전 수원 유세에 이어 오후에는 안양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단지 오후 2시로만 알고 있었다. 다시 확인해 보니 오전 12시 30분부터 2시까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후 1시 반에 차를 급히 몰았다. 중앙공원 주변에 주차해 놓고 연설을 듣고자 했다. 후보는 마지막에 등장했다. 도착하자 후보의 연설은 시작되고 있었다. 후보는 그동안 손마이크를 사용해서 연설했었다. 공식적인 선거운동 전에는 마이크 사용이 불허되..

양비론자와 양시론자를 냉소하며

양비론자와 양시론자를 냉소하며 전자계측장비 중에 스펙트럼아날라이저가 있다. 이를 우리말로 주파수분석기라고 한다. 전자제품 개발할 때 필수장비에 해당된다. 가격도 매우 고가이다. 특히 RF상품을 개발할 때 사용된다. 스펙트럼아날라이저는 일시에 전주파수대역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레디오프리퀀시(RF) 채널이 대역마다 뜬다. 낮은 주파수대역부터 높은 주파수대역까지 모두 다 볼 수 있다. 사람의 사상 스펙트럼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요즘 이념 스펙트럼이라는 말이 종종 사용된다. 극좌에서 극우까지 이념 스펙트럼이 있는데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 어떤 이는 인물에 대한 이념 스펙트럼을 만들었다. 그가 과거 했던 발언을 참고하여 이념지도를 만든 것이다. 태극기를 들었다면 극우로 분류할 것이다. 극좌는 어떤 것일까? ..

거짓말하다 탙탈 털린 후보

거짓말하다 탙탈 털린 후보 그동안 피해 다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제 4자 토론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는 한번도 방송에 출연하지 않았다. 당연히 유튜브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알 수 없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것도 오랜 세월 함께 살아 보아야 그가 얼마나 계율을 잘 지키는지, 얼마나 정직한지, 얼마나 견고한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토론하는 것을 보고서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제 4자토론을 유튜브로 들었다. 소리만 들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표정이나 손짓 등을 볼 수 없었다. 다만 톤으로 보아 흥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흥분..

이재명의 눈물

이재명의 눈물 정치초단에서 이재명의 눈물을 보았다. 진보유튜브 채널중의 하나이다. 오늘 성남유세에서 연설장면만 보여준 것이다. 이재명이 청소년기를 보냈던 상대원시장에서 유세를 말한다. 이재명은 자신의 가족사를 얘기했다. 1976년 상대원동 산동네로 이사 온 것이 성남과의 인연이 시작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같은 산동네 출신이다. 서울에 온 것은 1969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삼양동 산동네에 살았다. 주소에는 '산'이라는 말이 들어 갔다. 그래서 "삼양동 산75번지 박래홍씨댁내"라고 했다.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주소표기 방식이다. 왜 이렇게 특이한 주소가 되었을까? 1960년대는 이농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없어서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부모님도 이농대열에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