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 33

46권 담마의 거울 2013 I

46권 담마의 거울 2013 I 에스엔에스를 보면 과거 글에 대한 것이 보인다. 페이스북에서는 일년 전의 오늘에 쓴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를 소환하여 보여준다. 심지어 이년전 것이나 삼년전 것, 멀리는 십년전 것도 보여준다. 과거를 소환하지 않는다. 이미 지난 일이다. 다시 불러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옛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는 즐거운 것도 있고 쓰라린 것도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거의 대부분 빛나고 화려한 것들을 소환한다. 아프고 쓰린 것은 올리지도 않기 때문에 소환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빛나고 영광된 순간은 기억하려 하지만 힘들고 괴로운 것은 일부로 멀리 하는 것 같다. 책의 서문을 ..

책만들기 2022.02.09

아름다운 꿈을 꾸려거든

아름다운 꿈을 꾸려 거든 새벽 세 시에 깼다.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 어제 잘 산 것이다. 잘 절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알아차리려고 노력했다. 의도를 알아차리고자 했다. 모든 행위에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하는 일은 없다. 만약 자신이 하는 행위를 모른다면 사고의 연속일 것이다. 자꾸 잊어버리는 것도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편으로 행위에 있어서 찰나멸을 생각했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된다는 원리를 알고 있다. 생멸을 찰나멸로 대체하여 보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는 것은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찰나멸로 생각했을 때 어떤 이점이 있을까?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혐오의 마음이 ..

경전암송 2022.02.09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의 날에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의 날에 사람들은 위기가 닥쳐 보아야 실감한다. 기후위기도 그럴 것이다. 자신과는 무관한 먼나라 이야기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환경론자들이 생각하는 위기는 절박한 것이다. 2030년까지 온도를 1.5도 이내로 억제하지 않으면 파멸적 상황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2030년까지 불과 8년 남았다. 그때까지 1.5도 이하를 유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지구환경이 파괴되든 말든, 자원이 고갈되든 말든 오늘도 내일도 소비하기에 바쁜 것 같다. 오늘 아파트 마당에는 쓰레기로 가득하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쓰레기 버리는 날이다. 설명절이 끼여서일까 평소보다 두배는 많은 것 같다. 쓰레기가 그야말로 산더미를 이룬다. 이 많은 쓰레기는 대체..

진흙속의연꽃 2022.02.08

빠다나경 외우기 시동을 걸고

빠다나경 외우기 시동을 걸고 새벽에 일찍 깨면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멍하니 편한 자세로 있는 것이 보통이다. 흙탕물이 가라 앉듯이 마음의 정화가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생각을 지켜 보게 된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도 있다. 이는 마음의 거울로 비추어 보기 때문이다. 새벽은 온전한 나의 시간이다. 나의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고 내면으로 들어 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화된 상태에서 암송을 하거나 행선을 한다. 좌선은 거저 먹는 거나 다름없다. 이때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경 외우기를 말한다. 암송이나 행선, 좌선은 기억하는 것이다. 이전에 했던 것을 떠 올리는 식이다. 어쩌면 수동적인 것인지 모른다. 이전에 했던 것을 먹고 산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암송이 그렇다. 밀월기간이 있다. 나에게 있어서 암송..

경전암송 2022.02.08

시각이 나를 속일지라도

시각이 나를 속일지라도 행운목이 천정을 쳤다. 한번 커팅 했는데 그 자리에서 또 자라나 천정을 친 것이다. 행운목과 함께 또 다른 열대식물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각이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라고. 사물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식물도 역시 그 자리에 있다. 사물과 식물이 다른 점은 생명의 유무이다. 식물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자라지만 눈치 채지 못한다. 어느 날 바라보면 상당히 자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는 동물은 그 자리에 있지 않다.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움직이고는 있지만 사라져 소멸되어 버리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언젠가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

수행기 2022.02.07

물에 빠진 일곱 종류 사람이 있는데

물에 빠진 일곱 종류 사람이 있는데 차분한 일요일 아침이다. 아침 일찍 일터에 나와서 이렇게 자판을 두드려 본다. 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경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복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지난 1월 28일 금요모임에서 합송한 것은 일곱 종류의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물에 빠진 자와 같은 사람의 경(Udakūpamāsutta)’(A7.15)에 해당된다.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경을 보면 일곱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1) 세상에 어떤 사람은 한번 빠져서 가라앉는다. 2)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3)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서있는다. 4)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관찰하고 비추어..

내 나이가 어때서? 경 외우기에 딱 좋은 나이인데

내 나이가 어때서? 경 외우기에 딱 좋은 나이인데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있다. 왜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을까? 거친 말을 하기 때문일까? 초기경전에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 이는 우다나에 있는데“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Ud6.4)라고 표현되어 있다. 입에 칼을 무는 것은 논쟁할 때이다. 서로 견해가 다를 때 마치 입에 칼을 문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이다. 이교도들이 논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사견은 선천적으로 장님인 자가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다. 어느 한 부위를 만지고서는 “이것이 코끼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를 두고 외도들은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이다..

경전암송 2022.02.05

입춘대길(立春大吉), 위대한 축복의 메세지

입춘대길(立春大吉), 위대한 축복의 메세지 입춘대길, 이 말과 인연은 오래 되지 않았다. 불과 3-4년 된 것 같다. 성원정사와 인연을 맺고 나서부터 그렇다. 오늘 입춘대길 한지를 교체 했다. 작년에 단 것을 떼고 그 자리에 올해 것을 붙였다. 아파트 현관 안쪽 문에 붙인 것이다. 작년 연말 성원정사에서 달력을 보내왔다. 대봉투 안에는 달력과 함께 한지에 쓴 입춘대길(立春大吉)이 들어 있었다. 한문으로 쓴 것이다. 누가 쓴 것일까? 먹을 갈아 정성껏 쓴 네 글자이다. 송위지 선생이 쓴 것일까?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성원정사와 인연을 맺은 이래 해마다 연말이면 달력과 함께 입춘대길을 보내온다는 사실이다. 입춘대길을 떼고 붙이니 한해가 다 가고 새해가 시작된 것 같다. 바깥 날씨는 영하로 몹시 춥지만..

진흙속의연꽃 2022.02.05

거짓말하다 탙탈 털린 후보

거짓말하다 탙탈 털린 후보 그동안 피해 다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제 4자 토론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는 한번도 방송에 출연하지 않았다. 당연히 유튜브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알 수 없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것도 오랜 세월 함께 살아 보아야 그가 얼마나 계율을 잘 지키는지, 얼마나 정직한지, 얼마나 견고한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토론하는 것을 보고서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제 4자토론을 유튜브로 들었다. 소리만 들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표정이나 손짓 등을 볼 수 없었다. 다만 톤으로 보아 흥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흥분..

불가근불가원 2022.02.04

내가 회의론자에게 답하지 않는 이유

내가 회의론자에게 답하지 않는 이유 토론을 하지 않는다. 토론할 줄 모르는 것이 큰 이유이다. 토론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댓글에 답을 하지 않는 것도 토론에 자신 없기 때문이다. 블로그에서 종종 댓글을 받는다. 페이스북 댓글과 달리 블로그 댓글은 그야말로 불특정 다수가 된다. 페이스북의 경우 친구 관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블로그 댓글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블로그 댓글에 답글을 달지 않는다. 짤막한 문의에 짤막하게 답변은 하지만 긴 도발성 댓글에는 답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 큰 이유이다. 자신을 밝히는 경우라면 예외일 것이다. 더구나 예까지 갖춘다면 답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했..

담마의 거울 2022.02.03